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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 7품 관원 '주서' 왕과 신하의 만남에 동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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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영조 40년 10월 1일,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저녁 공부를 마치고 약방에서 들인 탕제를 마시던 영조는 갑자기 들려 오는 천둥 소리에 놀라 책상 밑으로 몸을 숨겼다. 탕평책과 균역법을 시행해 조선의 르네상스기를 열었다고 알려진 영조가 번개 소리에 놀라 책상 밑으로 숨다니….

이렇게 영조의 돌발적인 행동까지 우리가 자세히 알 수 있는 것은 당시 영조의 저녁 공부에 입시(入侍)했던 주서(注書) 민응세가 '승정원일기'에 남긴 기록 덕분이다.

주서란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고 있던 승정원의 정7품 관원이다. 승정원의 승지가 정책결정에 참여하는 고위관직이라면, 주서는 그 밑에서 문서를 작성하던 행정 실무자였다. 주서의 가장 중요한 임무가 승정원일기의 작성과 입시다.

입시란 왕과 신하들이 만나는 자리에 동석해 그들의 말과 행동을 기록하는 일을 가리킨다. 승정원일기의 입시 기록에는 대화뿐만 아니라 행동거지 또한 눈앞에서 보는 듯이 기록돼 있다.

'역사의 기록자'하면 흔히 사관(史官)을 떠올리는데, 넓은 의미로 볼 때 주서 또한 조선 역사 기록의 한 축을 담당한 사관이었다. 좁은 의미의 사관이 예문관 소속의 대교.봉교.검열을 가리키는 데 반해, 주서는 승정원 소속으로 별도의 직책이었다는 차이가 있다.

또 사관의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으로 편집돼 전말이 자세하지 않은 반면, 주서의 기록은 월별로 승정원일기로 만들어졋으며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했다는 점에서도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이렇게 사관과 주서는 모두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를 펴내며 조선의 기록문화를 꽃피웠던 주역들이었다. 우리가 다소 낯선 주서라는 이름을 기억해야할 이유다.

최재복(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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