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영 가족 소설 - 즐거운 나의 집 [1부] 여름 (17)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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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그림=김태헌

"두려워하지 마 우린 잘 해나갈 수 있을 거야."

엄마는 좀 낮은 소리로 말했다.

"엄마…. 내가 두려워한다고 생각해?"

엄마는 약간 망설이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위녕, 난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공부하는 것도 행복하게 하고, 먹는 것도 행복하게 먹고, 자는 것도 행복하게 자고."

엄마는 진지하게 말했다. 나는 피식 웃었다.

"어떻게 공부를 행복하게 해? 자는 거나 먹는 거라면 몰라도."

엄마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바라보았다.

"공부도 행복하게 해야 하는 거야. 어떤 대학에 합격하기 위해 오늘을 불행하게 사는 거 그거 좋은 거 아니야. 네가 그 대학에 합격하기 위해 오늘을 견딘다면, 그 희망 때문에 견디는 게 행복해야 행복한 거야. 오늘도 너의 인생이거든. 오늘 행복하지 않으면 영영 행복은 없어."

나는 엄마를 빤히 바라보았다. 엄마는 진심이라구, 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행복이라는 것에 대해 오래 생각한 자 특유의 자신감 같은 것이 그 말투에는 묻어 있었다.

"내가 만일 대학에 떨어지면?"

엄마는 맥주 캔을 놓고 잠시 고개를 갸우뚱했다.

"실은 생각해봤는데, 많이 생각해봤는데 상관 없더라구. 그게 뭐 어때서? 엄마는 살면서 좋은 대학 나오고 유학까지 갔다 온 박사 교수 의사 이런 사람들 중에 그 좋은 머리와 많은 학식으로 자신뿐만 아니라 남까지 망치는 사람들 많이 보았어. 중요한 건 네가 행복한 거고, 더불어 사는 법을 연습하는 거고, 그리고 힘든 이웃을 돕는 거야. 공부를 하고 유학을 가는 거 다 그걸 위해서야. 그게 아니면 그건 아무것도 아니야."

엄마는 엄마답지 않게 천천히 말했다. 많이 생각한 후에 하는 말 같았다.

"엄마는 행복해?"

내가 물었다. 엄마는 잠시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가만히 웃었다.

"응, 행복해. 우선 네가 있어서 그렇고. 또 죽을 것 같은 강물을 어떻게든 건너온 자부심도 있어. 아침마다 생각해. 오늘은 우주가 생겨난 이후로 세상에 단 한 번밖에 없는 날이다. 밤새 나는 이렇게 죽지 않고 살아 있다…. 아이들도 아프지 않고 잘 자고 있다. 새벽녘 창밖은 아직 싸늘한데 우리 집은 따뜻하다…. 언제부턴가 그게 얼마나 축복인지 알게 되었거든. 엄마랑 이렇게 사는 일, 새로 시작하는 일, 그렇게 장밋빛이지만은 아닐 거야. 힘이 들 때면 오늘만 생각해. 지금 이 순간만. ……있잖아 그런 말 아니? 마귀의 달력에는 어제와 내일만 있고 하느님의 달력에는 오늘만 있다는 거? …."

내가 그 의미를 생각하려고 잠시 입을 다물고 있자 엄마는 나를 보고 응? 하고 다시 물었다. 엄마의 얼굴 위로 언뜻 행복이 지나가는 것 같았다. 우주가 생겨난 이래로 처음인, 엄마와 나의 한 지붕 아래의 첫 밤이 그렇게, 천 개의 눈을 뜨고 엄마와 내가 앉은 창 밖에서 기웃거리며 지고 있었다.

자리에 누웠지만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낯선 모텔에 들어와 혼자 누워 있는 것 같았다. 엄마가 좋아하는 말 중에 "삶은 낯선 여인숙에서의 하룻밤"이라는 말이 있다. 스페인의 어떤 성녀가 한 말이라고 했다. 엄마는 전에 난데없이 전화를 걸어 "이 구절 좀 들어봐"하면서 그걸 읽어주었다. "평생을 수녀로 지낸 성녀가 말이야 여인숙을 알다니, 그것도 낯선 여인숙에서 자는 걸 알다니…. 너무 멋있지 않니?"하고 엄마 특유의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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