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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립다, 부질없는 열정이라도… '무서운 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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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장편소설 '우리는 사람이 아니었어'로 18회 오늘의 작가상을 받았던 소설가 임영태(45.사진)씨가 첫 소설집 '무서운 밤'을 펴냈다. 소설집에는 표제작 '무서운 밤'을 포함해 모두 9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임씨의 단편 속 세계는 밝고 산뜻하기보다는 칙칙하고 우울하다. '무서운 밤'은 길바닥에서 새해를 맞는 20대 후반의 주인공 두 명이 인파가 빠져나가 순식간에 휑뎅그렁해진 거리를 돌아다니며 겪게 되는 에피소드를 담고 있다.

새벽 거리에서는 신년이 무색하게 웬 남녀가 심하게 드잡이를 하고 있고, 술에 취한 남자들은 지나치다 어깨라도 부딪치면 욕을 해대고 쉽게 시비가 붙는다.

'을평에서'의 무대인 을평은 역전에서 읍내 중앙까지 2차선 신작로가 뚫려 있고 붉은 벽돌로 쌓아올린 높다란 목욕탕 굴뚝이 남아 있는가 하면 유리창에 '다방'이라는 노란색 선팅 글자가 선명한 다방이 낡은 단층 건물에 세들어 있는 전형적인 소도시다. 을평의 한 개인의원에서는 원장의 부인이 병원 사무장과 내연의 관계를 맺고 있고 지하 이발소에서는 여종업원의 은밀한 '특별 서비스'가 남성 고객을 기다리고 있다.

'돌아눕는 자리'에 등장하는 도자기 공장의 여직원은 주말마다 자신을 만나기 위해 서울에서 내려오는 남자에게 용돈까지 쥐어주며 헌신하다 끝내 버림받고는 허청거리는 발걸음으로 동네를 떠돈다.

매끈한 삶 이면의 신산스런 모습에 주목하는 소설 속 화자들의 심경은 낙천적이지도 않고 쾌활하지도 않다.

건강보험 청구용 컴퓨터 프로그램을 구입한 병원에 사용법을 교육하기 위해 을평을 찾은 주인공은 '열정은 집착이고 집착은 피로를 남긴다'는 생각 끝에 어떤 부질없는 열정에도 빠지지 않고 무심한 바람처럼 세월을 비껴가리라는 마음을 품고 있다. '전곡에서 술을 마셨다'에 등장하는 소설가는 사소한 것에 긴장하고 막연히 무력해지고 막연히 슬픈 '존재론적 슬픔'에 빠져 있다.

물론 음울한 주인공들이 칙칙한 현실에 전적으로 승복하는 것은 아니다.

'을평에서'의 주인공인 나는 색기가 흐르는 원장 부인의 제안에 따라 읍내를 빠져나간 국도변의 분위기 그럴 듯한 음식점에서 '유혹을 거부하지 말고 되는 대로 맡겨두자'는 마음을 품고는 술잔을 주고받는다. 2차를 위해 음식점을 나온 나는 두 사람을 미행한 사무장이 원장 부인 발 앞에 엎드려 "당신 없으면 못살아요. 차라리 날 죽여요. 제발…"이라며 흐느끼는 장면을 목격한다. 뜻밖에도 부인은 사무장의 얼굴을 끌어안고는 등을 토닥거린다. 예상치 못했던 두 사람의 포옹은 열정을 의식적으로 거부해온 나에게 낯선 것이다. 한편으로는 열정이 삶을 기획하고 실천하는 원리로서 긍정적인 것이라는 측면에서 두사람의 포옹 장면은 '무언가 매우 고전적인 풍경'이다. 나는 황망히 음식점을 빠져나와 국도변에 무릎을 꿇고 "차라리 날 죽여요. 제발…"이라고 힘겹게 중얼거린다. 나는 아마 이제는 나와 무관해져서 되찾을 가망이 없을지언정 중얼거림으로라도 열정을 불러보고 싶었는지 모른다. '포장마차'는 늦은 시각 한잔의 유혹에 갈등하는 술꾼의 내면을 실감나게 그렸다. 등단 이후 장편 작업으로 단련해 온 작가의 내공이 느껴진다.

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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