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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 → 실용주의 → 중도' 지지율 안 뜨자 승부수…손학규의 계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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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손학규 전 경기지사가 19일 밤 측근들과 저녁식사를 마치고 나오고 있다.[사진=김태성 기자]

지난 주말 한나라당을 요동치게 만들었던 손학규 전 경기지사의 장고와 잠행은 탈당 선언을 위한 '기획 이벤트'였을까. 그의 최근 행적을 되짚어 보면 곳곳에서 탈당을 암시하는 정치적 복선이 발견된다. 그의 탈당은 갑자기 벌어진 우발적 사건이 아니라 적어도 올 초부터 꾸준히 검토된 화두로 보인다.

◆기독교인이 산사(山寺)로 간 까닭=손 전 지사는 14일 봉은사 법회에서 "결정이 어려우면 더 어려운 길을 택하라고 했다"는 아리송한 말을 했다. '경선불참→탈당'의 수순이 여기서 처음 제시된 셈이다.

다음 날 손 전 지사는 양양 낙산사에서 칩거에 들어갔다. 이곳의 정념 스님은 기자들과 만나 "꽃망울을 터트리는 역할을 하고 싶다"고 한 손 전 지사의 말을 전했다. 그 뒤로도 백담사 봉정암, 용화선원 등 강원 지역 산사를 전전했다. 깊은 산속의 절을 찾은 손 전 지사의 행보는 그가 깊은 고뇌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암시하기에 충분했다.

손 전 지사가 기독교인이지만 탈당을 앞두고 굳이 산사를 찾은 것은 이 같은 이미지 효과를 노린 것으로 보인다. 그를 정치에 입문시킨 김영삼 전 대통령도 '산사 정치'에 능했다. 손 전 지사가 만났던 봉은사 명진 스님이나 정념 스님이 범여권과 친분이 있는 인물이라는 점은 향후 그의 행보를 짐작하게 하는 실마리이기도 하다.

◆참모 만류해도 갈 길 간다=손 전 지사는 15일 독자 신당 창당을 추진하는 단체인 '전진 코리아'창립대회에 갔다. 캠프 참모들은 "시점이 미묘하니 안 가시는게 좋겠다"고 강력하게 건의했지만 손 전 지사는 이를 물리쳤다. 그는 탈당 회견에서 " (전진코리아가) 새 정치 세력을 형성하는 데 큰 바탕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고 속내를 밝혔다.

그가 굳이 창립대회에 간 것은 그의 머릿속에 향후 구상이 마련됐던 것으로 봐야 한다는 얘기다. 탈당만 해도 절대 안 된다고 반대하는 측근들이 상당수였지만 그는 끝내 결행했다. 그에겐 탈당에 부담을 느끼는 상당수 캠프 참모들보다 즉각적 행동을 촉구하는 외부 그룹의 조언이 더 중요했던 것 같다.

◆경선 룰 불만인가, '이인제 방지법' 피하기인가=외형상 손 전 지사의 탈당 움직임은 16일 한나라당 경선룰이 확정된 뒤 급박해졌다. 그는 강재섭 대표의 중재안(시기 8월-참여인원 20만 명)은 이명박 전 서울시장과 박근혜 전 대표의 야합일 뿐이며 자신이 경선에 참여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다.

하지만 그가 요구한 '9월-100만 명'의 완전국민경선제가 수용되더라도 지금보다 월등히 유리해진다고 보긴 어렵다. 따라서 그의 탈당은 이번 대선부터 적용되는 '이인제 방지법'(당내 경선에 참여했다가 탈락한 사람은 본선에 출마할 수 없도록 한 선거법 규정)을 피하기 위해서란 관측이 우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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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도 깃발 든 것은 지지율 때문?=손 전 지사는 1970년대 노동.빈민운동에 뛰어든 진보 활동가였다. 대학 교수 시절에도 그는 진보파로 분류됐다. 그가 민자당(한나라당의 전신)에 입당했을 때 진보 진영에선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2002년 경기도지사 취임 후 그는 이념보다 경제 살리기, 일자리 창출 등에 주력하면서 이미지 변신을 꾀했다. 파주 LG필립스 공장 유치, 외자 14조원 유치 등 그가 자랑하는 지사 시절 업적은 대부분 경제와 관련된 것들이다. 당시 사정을 잘 아는 한 인사는 "이 전 서울시장을 의식한 손 전 지사가 진보 이미지로는 승산이 없다고 보고, 실용주의 노선을 채택한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 같은 노력에도 지지율이 좀체 오르지 않자 탈당과 함께 다시 중도의 깃발을 치켜드는 승부수를 띄웠다는 것이다. 한나라당이 그의 탈당 명분에 냉소적인 이유도 그가 실제로는 지지율 문제 때문에 당을 나갔다고 보기 때문이다.

글=김정하 기자 <wormhole@joongang.co.kr>
사진=김태성 기자 <ts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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