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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공연장 순례] 빈 슈타츠오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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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3월 12일 연합군의 공습으로 빈 슈타츠오퍼에 화재가 발생했다. 다섯 발의 포탄을 맞고 무대와 객석 대부분이 소실됐다. 실내 장식은 물론 오페라 120여편에 해당하는 무대 세트, 15만벌의 무대 의상이 모두 불에 탔다. 다행히 로비와 중앙계단, 로열석에 연결된 티룸(Tea Room), 모리츠 슈빈트가 그린 천장 로비 벽화는 살아남았다. 빈 슈타츠오퍼는 10월 6일부터 테아터 안 데어 빈(Theater an der Wien), 빈 폭스오퍼(Wiener Volksoper)에 임시 무대를 마련했다.

1947년 건축 설계 공모에서 에릭 볼텐슈테른(Erich Boltenstern)이 건축가로 선정됐다. 볼텐슈테른은 1949년 2월 24일 원래의 건축 디자인을 그대로 따르겠다고 했다. 같은 해 8월 8일 빈 시장 테오도어 쾨르너는 '복원'에 반대하는 등 간섭하기 시작했다. '귀족사회의 잔재'인 박스석을 헐어내자는 일부 여론에 동조한 것이다. 하지만 결국 발코니석 정면의 화려했던 바로크풍의 장식은 과감히 생략하는 대신 박스석은 그대로 두기로 했다. 돌과 합판, 양철 조각 등 불에 타기 쉬운 재질 대신에 불에 강한 강화 콘크리트를 썼다. 덕분에 5층 발코니석에 있던 기둥도 없앨 수 있었다. 시야가 한층 넓어졌다. 객석수도 2324석에서 2209석으로 줄었다(입석 567석 포함). 10년만에 말끔히 새단장한 극장은 1955년 11월 5일 칼 뵘이 지휘하는 베토벤의 '피델리오'로 재개관했다.

1869년 5월 25일 모차르트 '돈조반니'의 독일어 공연과 함께 개관한 빈 슈타츠오퍼는 원래 마(馬)시장이 있던 곳이었다. 당시 28세였던 요제프 1세는 빈 구시가지를 둘러싸고 있던 방어벽을 헐어낸 자리에 들어선 링 스트라세에 예술과 정치를 위한 호화 건축물을 짓도록 했다. 국회의사당, 시청사와 함께 연극 전용극장인 부르크테어터와 오페라하우스를 짓도록 했다. 에두아르트 반 데어 뇔(1812~68)가 인테리어, 아우구스트 폰 지카르트부르크(1813 ̄68)가 기본 설계를 맡았다. 하지만 설계 변경이 잦아 건축가들은 불만 투성이었다. 극장이 완공되자 시민들은 '푹 꺼진 상자'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에두아르트는 건물 분위기가 너무 조용하다는 세간의 평가에 대해 자책감에 빠져 자살했고, 지카르스부르크는 개막 공연에 불참한 데 이어 2개월만에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단돈 2500원에 오페라 관람하는 입석 인기

개관 당시 이름은 '신(新)궁정오페라 극장'. 객석은 6층 높이로 전형적인 말발굽형 구조로 돼 있다. 무대에서 가장 거리가 먼 입석까지 보태면 2천2백76명을 수용할 수 있다. 발코니석과 갤러리(입석)에는 작은 전구가 달려 있어 악보를 보면서 오페라를 즐길 수 있다. 빈 시민들은 567명을 수용할 수 있는 입석에서 카푸치노 한잔 값도 안되는 돈을 내고 오페라를 즐길 수 있다는 사실을 자랑스러워 한다. 발코니의 입석은 2유로(약 2500원), 무대가 가장 잘 보인다는 1층 뒤쪽은 3.5유로(약 4500원)다. 시즌 내내 언제라도 관람할 수 있는 입석 시즌 패스(60유로), 50장짜리 발코니 입석 쿠폰(75유로)도 불티나게 팔린다.

만석(滿席)시 잔향시간은 1.3초. 객석 천장에는 3톤짜리 크리스탈 유리와 1천1백개의 전구가 달린 샹들리에가 달려 있다. 객석 의자 뒷면에는 백만장자 출신의 음악애호가 알베르토 빌라가 기증한 전자 자막이 부착돼 있다. 영어.독일어.일본어 자막을 선택해 볼 수 있다.

로비에는 칼 뵘, 구스타프 말러, R 슈트라우스, 클레멘스 크라우스(1893~1954),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등 역대 음악감독들의 흉상이 전시돼 있다. 그 중 칼 뵘(1894~1981)의 흉상은 그가 75세 되던 때에 만들어진 것으로 뵘은 음악감독.총감독.극장을 거치면서 43년부터 13년간 이 극장에서 일했다. 말러의 흉상은 로댕의 작품이다. 샤를 구노의 흉상은 극장 방문 기념으로 만든 것이다.

또'마술피리'를 주제로 한 양탄자가 2층 로비 벽면을 장식하고 있다. 중앙 계단과 로비의 천장 벽화는 모리츠 폰 슈빈트(Moritz von Schwind)의 작품이다. 1층 로비의 아치 사이에는 에른스트 율리어스 헤넬(1811~91)이 만든 5개의 동상이 있는데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Heorism, Melpomene, Fantasy, Thalia, Amor다. 헤넬은 개관 당시 독일어권 국가에서는 가장 유명한 조각가였다. 다섯 개의 동상 중 Fantasy가 가장 키가 크다. '모든 예술적 창조에 길을 안내하는 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어서 오페라하우스의 건립 취지와 가장 잘 맞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2층 로열 박스 뒤에는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된 티룸(tearoom)이 있다. 칼 마데라(Carl Madjera)의 천장 벽화'예술의 알레고리'가 눈길을 끈다. 중간 휴식 때 왕족들이 차를 마시던 곳인데 지금은 왕정이 아닌 공화국이므로 누구라도 일정 금액을 내면 통째로 빌릴 수 있다. 대여료는 1분에 100달러가 넘는다. 휴식시간이 25분씩 2회라면 5000달러(약 500만원)를 내야 한다는 얘기다.

매년 새 그림 내거는 무대막

무대막(safety curtain)은 지금은 소실되고 없지만 원래 두 가지가 있었다. 비극적인 오페라에서는 '지하세계를 떠나는 오르페우스와 유리디체', 발레와 코믹 오페라에서는 페르디난트 라우프베르거(Ferdinand Laufverger)의 무대막이 사용됐다.

빈 슈타츠오퍼는 1996~98년 개.보수 공사로 최신 무대설비를 갖췄다. 뮐러 BBM이 음향 컨설팅을 맡았고 로비 위에 리허설 무대를 마련했다.

또 1998년부터 시즌마다 새 무대막을 쓰기로 했다. 1990년 빈에서 창설된 민간 기구인 'Museum in Progress(www.mip.at)'와의 공동 작업이다. MIP는 미술관이나 박물관이 아닌 공공 장소에서 임시로 미술작품을 설치하고 전시하는 운동을 벌이는 단체다. 매년 세계적인 미술 전문가들로 구성된 심사위원단이 작품을 선정한다. 선정 작품은 CALSI(Computer Aided Large Scale Imagery) 시스템으로 대형 헝겊(폴리에틸렌으로 만든 그물망 모양으로 짠 헝겊 패널에 복제되어 슈타츠오퍼의 16t짜리 철제 커튼(176㎡)에 자석으로 부착된다. 1998-99년 시즌은 카라 워커의 작품, 2006-2007년은 러크리트 티라바니아의 작품 '공포는 영혼을 삼킨다'가 선정됐다.

빈 슈타츠오퍼의 명물은 1935년부터 매년 카니발 시즌에 열려온 '오페라 무도회'(Wiener Opernball)다. 빈 슈타츠오퍼 소속 아티스트를 위한 무도회 겸 오스트리아 공화국의 공식 무도회다. 유명 정치인.외교사절.사업가.예술가들이 객석에 연미복과 드레스 차림으로 객석에 모습을 드러내는 빈 사교계 최대의 이벤트다. 올해 무도회에는 러시아 출신의 소프라노 안나 네트렙코도 참석했다.

건설 회사로 갑부가 된 오스트리아 출신의 리하르트 루그너는 매년 소피아 로렌, 게리 할리웰, 카르멘 엘렉트라, 파멜라 앤더슨 등 유명 연예인들을 자신의 박스로 초청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화요일 밤 공연을 마친 다음 1200명의 인부들이 투입되어 1층 객석을 철거한다. 오케스트라 피트는 무대 높이로 올리고 무대 위에는 오페라 박스석을 본따 만든 무대세트를 설치한다. 마치 무대와 객석 사이에 대형 거울을 올려 놓은 듯하다. 1986년 군터 슈나이더 지엠센(Gunther Schneider-Siemssen)이 디자인한 것이다.

빈 사교계의 최대 이벤트, 카니발 무도회

1층에는 무도회를 위한 마루 바닥이 깔리고 1만 5000 송이의 꽃이 무대와 객석을 온통 수놓는다. 수요일 저녁에는 무도회의 오프닝을 장식할 120쌍의 젊은 남녀들이 드레스 리허설을 한다. 목요일(내년은 1월 31일)과 금요일 밤 9시부터에는 5500명이 극장에 입장한다. 무도회는 밤 10시에 시작한다. 그중 1500명은 1층에서 직접 왈츠를 춘다. 드레스 리허설 관람(입장료 20유로) 때는 상관 없지만, 무도회 때는 모든 입장객이 연미복이나 이브닝 드레스를 입어야 한다. 기본 입장료가 215 유(약 27만원)로이며 박스석을 빌리려면 8000~1만 6000 유로(약 1000만~2000만원)를 따로 내야 한다. 4인용 테이블은 600 유로(75만원)다. 금요일 새벽 5시 오페라 극장은 단꿈에서 깨어나 일상으로 돌아간다. 같은 날 저녁부터 오페라 공연을 해야하기 때문이다.

무도회는 1991년 걸프 전쟁 발발로 취소된 것을 제외하면 매년 열린다. 최근에는 유명 인사들의 입장 시간에 맞춰 극장 바깥에는 무도회 반대 시위가 벌어진다. Opernballdemo라는 이름까지 붙었다.

정면 옥상 발코니에는 어린이 오페라를 상연하는 텐트극장'Kinderopern-Zelt'(140석)이 있다. 오스트리아 건축가 Wilhelm Holzbauer가 설계했으며 1999년 9월 19일 Hiller의 'Das Traumfresserschen'으로 문을 열었다. 스폰서의 이름을 따서'mobilkom-Zelt'라고 부른다. 텐트이긴 하지만 바람에도 끄떡하지 않고 외부 소음도 차단해준다. 날씨가 좋은 봄(4월~6일)과 가을(9월~10일)게 6~14세 어린이를 위한 공연이 열린다.

참고로 빈슈타츠오퍼를 카메라에 담을 때는 파사드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보다는 45도 오른쪽으로 비껴 서서 찍는 게 좋다. 다른 오페라하우스와는 달리 출입구 앞이 광장이 아닌 도로이기 때문에 건축가는 정면보다 측면에 많은 신경을 썼기 때문이다. 한스 가서(Hans Gasser, 1817~1868)가 만든 '로렐라이 분수대'도 오른쪽 잔디밭에 있다. 분수대 조각에는 세 명의 여인이 서있다. '사랑'은 가슴을 드러낸채 꽃잎을 세는 여인, '슬픔'은 머리를 떨군 채 오른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여인, '분노'는 바람에 머리칼을 나부끼며 머리를 높이 든채 오른손에는 칼을 들고 왼손으로는 망토처럼 옷을 온몸에 휘감고 있는 여인의 모습을 담았다. '사랑''슬픔''분노'는 오페라가 담아내는 가벼움(또는 기쁨)과 진지함(또는 슬픔과 분노)의 이미지를 형상화한 것이다. 분수대 맨 꼭대기에는 맨 위에 리라를 들고 있는 여인상'음악의 예술'이 있다. 조각가 한스 가서는 극장의 완공을 보지 못한채 1868년 5월 부다페스트에서 세상을 떠났다. 가서의 작품'무용의 예술'은 오페라 극장 중앙 계단에 있다.

극장에서 조금만 가면 원래 매표소로 쓰던 공간을 개조해서 만든 오페라 박물관(www.theatermuseum.at)이 있다. 1955년 재개관 이후의 빈 슈타츠오퍼의 역사를 한 눈에 보여준다.

◆공식 명칭: Wiener Staatsoper

◆홈페이지: www.wiener-staatsoper.at

◆개관: 1869년 5월 25일 (재개관 1955년 11월 5일)

◆건축가: 1869년 에두아르트 반 데어 눌(Eduard van der Null), 아우구스트 폰 지카르트부르크( August Siccard von Siccardsburg), 1955년 에릭 볼텐슈테른(Erich Boltenstern)

◆객석수: 2276석(입석 557석포함)

◆초연: 골트마크'시바의 여왕'(1875년)'겨울 행군'(1908년), 마스네'베르테르'(1892년),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1916년)'그림자 없는 여인'(1919년), 스트라빈스키'오이디푸스 왕'(1928년), 레하르'주디타'(1934년),

◆가이드 투어: 매일 오후 2시, 3시 출발

◆주소: 1 Opernring

이장직 음악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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