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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드골헌법 책 구해달라"주점. "유신헌법 잘되면 동남아 수출"(박대통령)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6면

<25면에서 계속>
김전비서실장은 잉태과정을 지켜보았던 밀접한 목격자다. 그의 증언.
『71년5월 3선 대통령에 취임한 후 박대통령은 여러 사람에게서 여러 나라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현지 외교관이 서울에 들어오거나 국회시찰단이 외국을 방문하고 오면 박대통령이 만나는거죠 .
예를 들어 핀란드의 2원 집정제나 계엄령·일당제를 고집하는 대만도 있었어요. 인도네시아 수하르토 대통령이 국회의원 일부를 지명하는 제도등에 관심이 많았죠 .
특히 박대통령이 주목한 것은 프랑스 드골헌법이에요. 당시 유럽에 나가있던 예비역장성 모대사가 드골이야기를 했죠. 프랑스가 내각제와 알제리사태로 혼란스러웠는데 긴급조치권으로 무장된 헌법을 만들어 국론을 수습해 프랑스 영광을 되찾았다는 내용이었죠』

<"유신은 소신"불변>
이 사람외에도 당시 주 인도네시아대사는 수하르토식 국회의원임명제(나중에 유신헌법유정회제도)에 대해 장문의 보고서를 제출하기도 했다고 한다. 박대통령은 우선 김실장에게 『드골헌법책 좀 구해달라』고 했다.
여기서 우리는 반유신론자에게「어용학자」라고 내몰려온 두 이름과 만나게 된다. 한태연(서울대)과 갈봉근(당시 중앙대).
한교수는 헌법학계 거두였으며 갈교수는 그의 제자로 같은 학맥이었다. 「어용」이란 꼬리표는 노선때문이었다. 양인은 유신작업 후 73~79년 9,10대 유정회의원을 지냈던 것이다.
이제 그들의 주장을 들어보자.
양인은 똑같이 『유신은 소신이었으며 그때가 다시 온다해도 똑같이 행동할 것』이라고한다. 『다만 유신헌법중 우리가 손댈수 없었던 몇몇 부분이 문제였다』는 설명을 붙인다.
한씨(76)는 이렇게 증언했다.
『71년 가을쯤인가 청와대에서 나한테 「드골헌법개요를 좀 보내달라」고 해요. 드골헌법이야 내가 평소에 연구하던 것이라 쉽게 정리해 보내주었죠. 나는 그때「뭔가 체제변혁을 시도하고 있구나」라는 느낌을 가졌어요.
한 1년쯤 지나고 72년10월17일 비상계엄이 선포된 날 청와대비서실에서「갈교수하고 같이 내일 오전9시까지 들어와달라」고 해요.

<한·갈교수 참여>
갔더니 박대통령이 「원칙상 학자여러분에게 맡겨야 되는데 보안문제도 있고해 법무부에서 헌법초안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양해하시고 오늘부터 법무부에 가셔서 마무리작업을 좀 도와주십시오」라고 하더군요.』
한씨는『우리가 맡은 일은 겨우 자구수정에 불과했다』고 한다. 헌법개정 주도론에 대한 반박이다.
『법무부에서 그래요. 「골격은 손댈 생각하지 마시라」고요. 반도호텔에서 비밀작업을 하는데 검토해보니 몇몇군데 무리한 부분이 있더라고요.
만약 우리가 손댈수 있었다면 유정회제도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선거에서 정당개입을 못하게 한 규정 따위는 고쳤을 거예요.
유신에서 중요한건 뼈대예요. 여러설이 많지만 내가 알기론 그 뼈대는 박대통령이 직접 만들었어요.
박대통령은 나한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어요. 「한교수, 내가 전문가는 아니지만 공부를 많이 했어요. 이것저것 연구해 골자를 만들어 법무부에 주었지요」라고요. 「이 헌법은 우리가 독자적으로 개발한 거니까 운영만 잘되면 동남아에 수출까지 할 수 있을거요」라는 농담도 덧붙이고요』
한씨는 『어용이란 표현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그런 단어는 모르고 내가 아는건 소신이란 명사뿐』이라고 했다. 『유정회도 그래요. 나는 5·16혁명후에도 6대때 내소신으로 공화당전국구에 들어간 적이 있어요. 73년초 청와대에서「유정회에 들어와 달라」고 해「6대때 별로 정치에 재미를 못 봐 하고싶지 않다」고 했지요. 그런데 「대통령이 원하신다」고 여러번 부탁하더라고요』
『유신헌법론』저자 갈교수(60)는 지금 일본 경도에 있는 한대학교에서 헌법을 강의하고 있다. 국제전화선에 흐르는 그의 목소리는 한교수와 일전일심의 유신소신론이었다.
『헌법학계에는 국민권리쪽을 중시하는 학파도 있지만 국가책임·의무를 강조하는 시각도 있어요. 헌법학 역사가 그렇지요. 한교수는 후자쪽이었고 나도 그런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소신껏 참여했지요. 한교수 말대로 골격은 이미 만들어져 있었어요. 통일주체국민회의나 유정회제도가 법무부안에 다 들어 있었죠.
가만히 뜯어보니까 「주체」라는 말이 거슬려요. 그래서 「주체는 전체주의 비슷한 냄새가나니 빼는게 좋겠다」고 했지요. 그렇지만 받아들여지질 않았어요. 아마 정부당국자들은 이북과 대결하기 위해선 여기에도 「통일주체세력」이 있다는 걸 보여주어야 한다고 믿었던 모양이에요』

<「주체」란말 못뺀다. >
갈씨는 시중에 떠돌던 자신의 「프랑스행」도 확인해주었다.
『가긴 갔지요. 그러나 헌법개정작업을 위한 건 아니었어요. 헌법안이 공고된후 이론적인 보충을 위해 공부하러 간거죠. 정부당국자 몇사람도 같이갔어요』 김정렴전비서실장은 두 교수부분에 대해 『나의 명예를 걸고 이야기하건대 두사람은 지금까지 억울하게 어용학자로 몰렸다』고 했다. 『헌법개정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다』는 그들 주장이 진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양인의 이력과 정치활동을 살펴보면 「어용」은 아니더라도 소신론에 부끄러운 대목이 여럿 있다.
한교수는 79년 10대국회에 들어와선 유정회 부의장겸 정책위의장이란 감투를 썼다. 유신동맥경화증으로 국민이 신음하고 야당총재가 제명당했으며 YH여공이 개처럼 끌려나와도 그가 말하는 「지식인의 소신」은 오간데 없었다.
갈교수도 크게 다르지 않다. 본인은 5·16때 『군사혁명세력이 헌법을 부쉈다』는 헌법파괴론을 주장했다고 하면서도 학자의 길을 버리고 유정회에 입문한 사연이 석연치 않다. 두사람 진의가 어쨌든 유신을 위한 국민조작·홍보에 이용됐던 것만큼은 부인할 수 없다.
유신은 박정희에겐 제2혁명이었다. 동시에 그것은 우리 역사에서 정치의 목을 비튼 두번째 쿠데타였다.
박정희의 잉태된 꿈은 71년 후반부터 72년 전반까지 남북대화를 하면서 현실화되기 시작했다. 닉슨이 중공에 가고 월남패망이 내다보이는등 국제정세도 숨가쁘게 돌아갔다.
72년 유신작업엔 여러 손들이 참여했지만 그중 아직까지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은 중심인물이 K검사다. 당시 유신과정을 면밀히 목격했던 증언자 Q씨는 『K검사얘기를 포함해 비밀스런 사연을 모두 밝히겠다』고 나섰다.<김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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