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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계 불확실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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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부계 불확실성'이란 말이 있다. 어머니는 100% 자기 자식을 확신하지만 아버지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최근 영국과학원 회보 '프로시딩스'에 흥미로운 연구가 실렸다. 사람들은 친가보다 외가에 친밀감을 더 느끼며, 그 이유는 부계 불확실성 때문이라는 것이다. 연구에 따르면 사촌 집에 불이 났을 때 뛰어들어 구하겠느냐는 질문에 친가보다 외가 쪽이 높은 순위를 차지했다. 부계 불확실성이 이타적 행동을 차별적으로 조절하는 심리기제를 발전시켰다는 것이 연구진의 설명이다.

연구는 고모보다 이모가 가깝게 느껴지는 우리의 일상 심리에 대한 답을 준다. 미국 연구지만 최근 우리 상황에도 잘 맞아떨어진다. 초등학생들에게 가계도를 그리게 하면 백이면 백, 친가보다 외가 위주로 그린다. '겉보리 서 말만 있어도 안 한다'던 처가살이에 대한 남성들의 거부감도 크게 줄었다. 식사시간 상석에 아버지 대신 어머니가 앉아 있는 영화 장면도 어색하지 않다('좋지 아니한가'). 특별히 소외된 가장도 아닌데 말이다. 이 영화에는 아버지가 다른 아들, 노처녀 이모도 함께 산다. 최근 급격히 불고 있는 '신(新)모계화' 바람을 보여 주는 예들이다.

중국 윈난(雲南)성 부근의 '모쒀(摩梭)족'은 세계에서 보기 드문 여인국이다. 1500여 년간 모계사회를 유지해 왔다. 해발 2700m 첩첩산중에 '주혼'이라는 독특한 풍습 때문이다. 여자가 13세가 돼 성인식을 치르면 자유롭게 복수의 성적 파트너를 택하는 풍습이다. 남자들은 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성관계를 맺을 때만 여자 집을 찾는다. 당연히 아버지가 분명하지 않다. 태어난 아이들은 여자들이 기른다. '아버지' '남편' '시집간다'는 단어 자체가 없다. 최소한 필요한 아버지 역할은 외삼촌이 대신한다. 가장은 여자다. 역시 부계 불확실성이 낳은 일이다.

알고 보면 지금의 가부장적 가족관계의 뿌리도 부계 불확실성이다. 농경사회 부의 축적이 시작되면서 재산을 진짜 자기 아들에게 물려주려는 남성들의 보존욕망이 낳은 제도가 바로 가부장제이기 때문이다. 시집온 여자는 남편에게 귀속되며 재산과 혈통은 아들들에게 물려지고 정조의 의무는 여성들에게만 주어지는, 부권 중심 제도다.

어쩌면 위의 연구는 부계 불확실성이 부권 사회를 확립시켰지만 사람들의 심리 속에는 '모계 확실성'과 모권에 대한 반사적 그리움이 오랫동안 쌓여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닐까.

양성희 문화스포츠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