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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야화(14)세 천재 이야기(2)|조용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1934년께라고 기억한다. 그때 나는 운니동 운현궁 뒤에 살고 있었고 벽초 홍명희는 그 건너편 교동학교 뒤 골목 안에 살고 있었다.
운정 김정진이라는 희곡작가가 있었는데 방송국 조선어방송 과장을 하고 있었다.
이 분이 자주 벽초 집에 들르면서 그때마다 나를 불러 같이 갔다.
벽초는 사랑방 보료 위에 앉아 손님을 대접하면서 『임꺽정』원고를 고치고 있었다.
쓰고 고치고 해 새까맣게 된 조그만 원고지를 방 보료 밑에다 집어 넣고 손님들과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얼마 있다가 원고지를 또 꺼낸 벽초는 『에이 힘들어. 일껏 고쳐놓고 다시 읽어보면 고치지 않은 그 전 것이 낫단 말이야. 그래 또 고치는데 이래서 원고지가 새까맣게 되고 헛수고만 하는 것이지』라며 껄껄 웃으면서 원고를 가지러온 신문사 사동에게 내주었다. 이렇게 아침나절에는 원고지와 씨름을 하고 오후가 되면 두루마기에 모자를 쓰고 동네 책사로 바람쐬러 나가는 것이다.
동네 책사란 교동보통학교 큰길을 내려가다가 오른쪽에 있는 옛날의 건국대학교사 못미처 서쪽길 모퉁이에 있는 대동서림이라는 헌책 가게였다.
이 책사 주인이 김아무개라고 하는 얼굴이 얽은 분인데 벽초의 친척이었다.
책가게는 서너간 밖에 안 되는 좁은 마루방으로 갖가지 옛날 책이 천장에 닿도록 겹겹이 쌓여 있었다.
이 가게는 서울에서 유명한 양반책사라고 해서 늙은 양반들이 많이 모여들어 사랑방 구실을 하였다.
책가게에 매일 나오는 사람이 김태준이었다. 김태준은 『조선소설사』를 지은 매우 유망한 국문학자였는데 불행히 6·25사변 때 총살당했다.
김태준은 벽초에게 국문학·한국역사에 관해 여러가지를 열심히 물었고 벽초는 거침없이 자세히 가르쳐 주었다.
벽초는 놀라운 기억력을 가지고 있었다.
육당과 위당 정인보도 그의 기억력에 관한 한 탄복을 금치 못했다.
자기들은 책을 찾아보고서야 겨우 아는데 벽초는 그냥 슬슬 외어 가더라는 것이다. 머릿속에 모든 것이 정돈되어 있어 책을 안 보고도 다 알고 있는 것 같다고 하였다.
그가 한국 문학이나 역사에만 밝았지, 서양학문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줄 알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해방 후 어느 잡지사에서 젊은 학자와 예술가들의 좌담회를 개최했을 때 그 좌담회의 주인공은 벽초였다. 그가 서양문학, 예를 들면 안톤 체호프라든지, 앙드레지드에 대해 일가견을 가지고 있을 것은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때에 전문학자 이외에는 별로 아는 사람이 없는 독일의 철학자 후세를에 대해 상당히 깊이 알고 있고, 더구나 그의 현상학에 대해 상식 이상으로 알고 있었다는 것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의 최신학문이었던 현상학에 대해 그만큼 큰 관심이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경탄할 일이라고 나중에 좌담회에 참석했던 사람들이 이야기하였다.
또한 벽초를 고리타분한 한학자 타입으로 알지 모르지만 그는 유머를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위당 정인보와 사돈간이었다.
벽초의 둘째아들이 위당의 사위였고, 집도 태평양전쟁 중에는 의정부의 한 동네에 살고 있어 두 사람은 무시로 왕래하였다.
어느 날 벽초가 위당의 집에 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자기가 위당의 아호를 지었는데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무어냐고 물으니까 벽초는 웃음을 참으면서 자못 정중하게 『하 위자, 즐거울 락자, 집 당자 위락당이라고 하는 게 어떻겠소』하였다. 『위락당, 위락당-. 그거 좋군. 그럼, 그렇게 쓸까』하고 위당이 좋아하였다.
그 다음날 다른 친구가 위당을 찾아와 『자네, 벽초한테 속은 것 아나』하고 웃어댔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 잠시 머뭇거리니까 그 친구가 껄껄대면서 『위락당, …참 좋다. 그것을 거꾸로 읽어보아. 「당나귀」야, 당나귀.』 정인보의 별명은 옛날부터 당나귀였다.
그에 대한 정인보의 대답이 좋았다.
그는 성도 안내고 웃으면서 『그래, 그러면 가운데 즐거울 락자를 빼고, 위당이라고 하지.』 이래서 정인보의 아호가 「위당」으로 된 것이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인가. <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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