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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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마술사로부터 신기한 지우개를 받은 사람이 있었다.
『이 지우개로는 어떠한 것도 다 지울 수 있다. 딱 한가지만 빼고는….』 그는 지우개를 가지고 신문을 지워보았다. 세계의 높은 사람들 얼굴을, 그리고 말씀을. 그러자 보라, 정말 말끔히 지워지고 없지 않은가. 그는 신이 났다. 그림책도 지우고 사진첩도 지웠다. 시도 지우고 소설도 지웠다. 그는 아예 사전을 지워버리기로 했다.
그런데 지우개로 아무리 문질러도 다른 것은 다 지워지는데 한 단어만은 지워지지가 않았다. 땀을 뻘뻘 흘리며 문지르고 문지르다 마침내 지우개가 다 닳아지고 말았다.
그와 그 지우개가 끝내 지우지 못한 단어는 이것이다.
「사랑」.
이 글은 아동문학가 정채봉씨가 어른들을 위해 쓴 동화 「지우지 못한 한마디」를 전재한 것이다.
이처럼 짧은 글로 어쩌면 그렇게도 강렬한 이미지를 전달할 수 있을까. 이것은 하나의 충격이었다.
『멀리 가는 향기』『내 가슴 속 램프』『향기 자욱』에 이어 정씨가 내놓은 「생각하는 동화시리즈」의 네 번 째 책인 『나』에는 「자아」를 잃어버린 삶에 깊은 통찰의 계기와 반성의 공간을 만들어 주는 동화 28편이 실려 있다.
오늘하지 않으면 다시는 못할 것처럼 지금을 소중히 사는 벗들과 그들의 벗이 되기 위한 사람들을 위해 작가는 특유의 따뜻한 가슴과 투명한 언어로 잃어버린 「나」를 되돌아보게 한다.
일곱 번 째 이야기 「나」는 이 동화집의 성격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한 사람이 「인간연구소」를 찾아가 「보통사람」의 특징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한다. 소장은 슬라이드를 통해 어느「보통사람」의 눈동자·코·귀·입 등을 보여준다.
화면에 나타난 눈동자는 흐리멍텅하다가 먹이나 사치품이 나타날 때만 반짝거렸고, 귀는 우스갯소리와 험담에나 솔깃했으며, 입은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한 채 경망스럽게 주접을 떨었다.
『도대체 저 눈·코·입·귀는 누구의 것입니까.』
「인간연구소」를 찾은 사람의 경멸에 가득 찬 물음에 소강은 주민등록번호를 일러주는데 그 번호는 바로 자신의 주민등록번호였다.
일러스트레이터 김복태씨의 에스프리 넘치는 삽화와 잘도 어우러진 이 성인 동화집은 내용뿐만 아니라 편집의 아름다움에서도 서가에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을 만큼 빼어났다. 샘터 발행·2백3쪽·3천5백 원. <최형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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