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7화|서울야화(1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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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국민여론의 절대지지를 받으며 반민특위활동이 계속되는 동안에 61명의 자수자도 나왔다.
그러나 반민특외의 행동을 반대하는 운동도 치열해져서 고등경찰출신의 현직 경찰간부들에 의한 특위위원 암살 음모사건도 발생하였다.
이들은 백민태라는 직업테러리스트를 포섭하여 국회 안의 강경파의원들을 암살하려 하였으나 백민태가 자수해와 음모가 드러났다.
필경 6월6일에는 40명의 무장경찰대가 특위를 습격해 무기와 장비를 압수하고 특경대원 35명을 연행해서 혹독한 고문을 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국회프락치사건으로 많은 국회의원들이 구속되고 김구가 암살되는 등 사건이 속출하였다.
국회는 마침내 2년 간으로 된 반민법공소시효 만료기한을 8월 31일까지 단축하는 개정안을 통과시킴으로써 반민족행위자 처단사업은 사실상 종결되는 결과가 되었다. 이에 따라 특위조사위원과 특별검찰관이 사임하고 잔무만 처리해갔다.
반민법 공소시효가 만료될 때까지 취급한 조사건수는 6백82건인데 체포가 3백5건, 미체포 1백73건, 자수 61건, 검찰 송치 5백59건이었다.
유야무야한 반민법 시행으로 개인의 영달만을 위하여 악질적 친일행동을 자행했던 자들은 법적으로 사면을 받은 것 같은 결과가 되어서 그 뒤 아무런 제약 없이 각 부분에서 자유롭게 활동하게 되었다.
이승만 정권의 이런 처사로 해서 민족정기나 사회정의에 입각한 건전한 가치관이 없어졌고 세상은 사리사욕과 영달주의만으로 차 있어서 오늘날과 같은 세태를 낳게되었다.
그것은 그렇다고 하고 건국 초에 높은 식견과 넓은 안목을 가진 현명한 지도자가 필요한 때에 한사람도 아니고 네 사람을 단시일 내에 다 잃어버렸다는 것은 나라를 위하여 큰 손실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50년 6월에 김일성의 남침으로 정부는 부산으로 옮겨졌고 한국군의 통수권이 미군으로 이양되어서 유엔군이 모든 군사행동을 지휘하게 되었다.
그 뒤 맥아더 장군의 탁월한 지휘로 유엔군이 반격에 나서 9월에 인천 상륙작전을 감행하고 드디어 괴뢰군을 38선 이북으로 내몰아 서울을 탈환하였다.
유엔군은 공격의 여세를 몰아 압록강까지 쳐 올라갔으나 겨울에 중공군이 인해전술로 밀물같이 몰려 내려와 드디어 유엔군이 후퇴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정부는 두 번째로 부산으로 내려가고, 여름에 빨갱이들에게 죽을 욕을 당해온 백성들은 서울에 앉아서 죽는 것보다 가다가 죽더라도 남쪽으로 피난 가겠다며 옷가지를 걸머진 채 어린것들을 이끌고 엄동설한에 걸어서 길을 떠났다.
서울에서 수원, 수원에서 대구까지 철도 연변 큰길을 메운 이들 피난민들의 죽음의 행렬은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유엔군사령관이었던 리지웨이 장군은 이 피난민의 행렬을 보고 『세기의 비극』이라고 개탄할 지경이었다.
이 피난길에서 수많은 불쌍한 남녀노소가 죽었다.
1951년 1월 5일 중공군이 서울에 입성하였는데, 사람 하나 없이 텅 빈 서울을 보고 놀랐다. 여름에 어떻게 북한 사람들이 못되게 굴었기에 백성들이 죽을 각오를 하고 피난길을 떠났겠느냐고 저희들과 한패인 북한 공산당을 비난했다고 한다.
유엔군은 2월 10일 다시 서울을 탈환하고 소련의 제의로 유엔 측과 북한측이 휴전 회담을 갖게되었다. 개성의 인삼장에서 시작하다가 디시 개성 남쪽인 판문점으로 옮겨서 51년 7월부터 기나긴 휴전회담을 계속하였다.<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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