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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월요인터뷰

"쾌적한 삶의 공간 만드는 게 바로 국가경쟁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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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만난 사람 = 김종혁 사회부문 부에디터 한국의 대도시에는 폭력이 가득하다. 건물들마다 덕지덕지 나붙어 아우성치는 조잡한 간판들, 야비하고 거친 내용의 플래카드, 현기증 나게 알록달록한 원색의 조명들…. 이로 인해 시민들의 눈은 지치고, 마음은 황폐해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폭력이다. 지난해 7월부터 매주 한 번씩 서울대 미대 권영걸 학장의 '공공디자인 산책'이 중앙일보에 연재되고 있다. 시민을 위한 거리, 다시 가보고 싶은 도시, 품격있는 사회를 만들어 가기 위한 외침이다. 그로부터 7개월, 서울시를 비롯한 20여 개 지자체가 동참을 선언했다. "화보 책에 나오는 외국 도시들처럼 살 만한 공간을 꾸며보자"는 각성이 시작된 것이다. 국내 공공디자인 운동의 첫 주자인 권 학장을 9일 오후 편집국에서 인터뷰했다.

-디자인은 잘 알겠는데 공공디자인이란 개념은 생소하다. 그게 뭔가.

"한마디로 일반 불특정 시민들을 위한 디자인이다. 상업디자인이 개인의 취향과 선호에 초점을 맞추는 것과는 다르다. 공공(公共)을 위해 디자인되고, 또 공공에 의해 디자인된다. 대단히 앙가주망적(사회참여적) 성격이 강하다. 공공디자인의 결과물 역시 공공으로 되돌아간다. 링컨의 게티스버그 연설에 나온 민주정부에 대한 정의와 비슷하다. 공공의, 공공에 의한, 공공을 위한(of the public, by the public, for the public) 디자인이다. 하지만 사실은 모든 디자인은 공공성이 전제돼 있다. 상업디자인도 마찬가지다."

돈 들이고 망치는 사례 많아

'꿈의 생태도시'로 불리는 쿠리치바의 거리. 쿠리치바는 브라질 남동부 파라나주의 주도.

-상업디자인이 공공성이 있다는 게 무슨 뜻인가.

"(웃으며) 넥타이나 스카프의 디자인은 개인의 취향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하지만 넥타이를 매고 대문을 나서는 순간 일종의 공공적 성격이 부여된다. 간판을 예로 들어 보자. 간판은 주인들 것이다. 하지만 역시 공공성이 있다. 시민들이 눈을 감고 걸어 다닐 순 없다. 보기 싫은 간판도 강제로 봐야 한다. 잘못된 디자인은 사회적 폭력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시민들은 거기에 저항할 수도 없다.

"그렇다. 시민들은 간판의 홍수 속에서 살아 왔지만 저항 한번 제대로 못했다. 이제 달라지고 있다. 어떤 시민단체는 공공디자인 소환제를 촉구하고 있다. 도시를 추악하게 만드는 공공 시설물이 있다면 그게 거기에 있게 만든 어떤 의사결정 과정이 있을 것이다. 그 책임 소재를 밝히고 시정하자는 것이다."

보행자 천국의 도시 코펜하겐의 버스 정류장.

-그런 걸 막는 법이 있지 않은가.

"도시가 이 지경이 된 중요한 배경 중 하나가 법을 제대로 적용하지 않아서다. 지금 거리에 나와 있는 광고물의 대부분이 불법이다."

-법 못지않게 시민 의식도 중요하지 않은가.

"일본만 해도 공공디자인을 위한 주민 자율협정제가 있다. 주민들 스스로 간판 수를 줄이고 감시하는 것이다. 공동체를 위해서다. 자율성과 자발성에 기초한 환경 지킴이 활동이 있다. 또 시 차원에선 야간 경관조명이나 건물의 색채, 거기에 놓이는 공공 미술품에 이르기까지 심사가 엄격하다."

-공공디자인이 사회의 법적.제도적.의식적 발전 수준과 비례한다는 걸 알겠다. 또 공공의 삶을 가장 먼저 고려한다는 측면에서 휴머니즘적 요소도 있어 보인다.

"분명히 그렇다. 공공디자인의 근본 정신은 인본주의와 박애주의다. 무생물인 제품을 위해 디자인이 있는 게 아니라 공공을 위한 것이므로 휴머니즘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보자. 선진국도 겨울에 얼어 죽는 노숙자가 적지 않다. 한데 도시에는 주택이든 아파트든 상업빌딩이든 따뜻한 공기 배출 구멍이 많다. 라코비츠라는 디자이너가 건물에서 배출되는 공기를 끌어들여 노숙자가 지낼 수 있는 텐트를 개발해 냈다. 제작비는 약 10달러다."

보행자 천국의 도시 코펜하겐의 버스 정류장.

디자인 강국의 황폐한 거리

-공공디자인은 어떤 게 있는지 좀 구체적으로 말해 달라.

"공공디자인의 대상과 영역은 사물(시설물)과 공간.이미지로 나눌 수 있다. 시설물은 여러 가지가 있다. 거리에서 마주치는 교통표지판과 같은 각종 표지 시설, 가로 시설, 위생 시설 등이 있다. 경찰관의 제복이나 환경미화원이 입는 안전 재킷도 여기에 포함된다. 공간은 가로.공원.학교 같은 교육 시설, 유아원 등 보육 시설, 리조트와 공항까지 포함하는 개념이다. 이미지는 빛과 색을 매질로 해 이뤄진다. 도심에서 이뤄지는 이벤트도 여기에 포함된다."

-그럼 돈을 많이 투자하면 좋은 공공디자인이 나오나.

"아니다. 오히려 돈 들여 망치는 공공디자인도 많다. 요즘 전국 지자체들이 가로등을 바꾸는데 거기에 불필요한 장식물이 너무 많다. 돈은 많이 쓰지만 디자인은 나빠졌다. 아파트 벽면에는 그냥 깨끗이 동 표시만 하는 게 제일 좋다. 그 벽면을 가득 채워 벽화를 그려 넣는 건 돈 들여 망치는 사례다. 정보를 필요한 만큼만 제공하는 게 바로 좋은 공공디자인이다."

-정보량을 줄여야 좋은 디자인이라는 말인가.

"도시는 정보로 이뤄져 있다. 상위 정보는 공공의 정보다. 공공의 정보는 사회의 안녕과 질서를 위해 가장 잘, 그리고 신속히 전달돼야 한다. 그런데 개인적이고 상업적인 정보가 범람해 공공의 정보가 침범당하면 안 된다. 식당의 메뉴는 식당 안 메뉴판에 있어야 한다. 그런 정보까지 간판으로 나온다. '순두부찌개 3500원'하고. 정보량을 줄이는 게 오늘날 우리 도시의 과제다."

-살 만한 도시가 되려면 빛과 물.색채가 중요하다는 얘기를 들었다. 맞는가.

"인간은 기본적으로 물을 좋아한다. 물은 곧 생명이다. 그래서 어느 도시나 시민들이 모이는 곳에 분수 등 여러 형태로 물을 두려는 노력을 한다. 인간은 또 빛에 반응한다. 잘된 야간 경관은 도시의 품격을 높인다. 색채도 마찬가지다. 선진국 도시들은 모두 자기에 맞는 색채를 연구한다. 생태학적으로 건강한 도시는 지질과 풍토에 맞는 색깔을 갖고 있다. 인공물은 그걸 배경으로 하는 풍토.지리적 색에 통합된다."

-신토불이 같다.

"그뿐 아니다. 선진 도시들은 공기 색도 연구한다. 지중해의 빛나는 도시와 북유럽 스칸디나비아의 공기 색은 전혀 다르다. 그걸 감안해야 한다. 도시는 인간을 끊임없이 소외시키는 거대한 공룡이다. 그러니 가급적 사람들을 밖으로 나오게 해 상호작용을 하도록 만드는 도시가 좋은 도시다."

-잘 디자인된 도시의 대표적 사례를 들어 달라.

"브라질의 쿠리치바는 세계의 생태학적 디자인을 공부하는 사람들의 순례지다. 보행자와 자전거 타는 사람들에게 거리에서의 우선권을 부여하는 코펜하겐도 모범 도시로 친다. 빛을 자제하고 정제된 색을 사용해 주변 경관에 아름답게 통합된 잘츠부르크도 있다. 또 지도 한 장만 있으면 어디나 갈 수 있는, 잘 읽혀지는 도시가 영국의 브리스틀이다."

-한국의 공공디자인 수준은 어떤가.

"불행하게도 매우 낮다. 우리가 디자인 역량이 없어서 그러면 안타깝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린 디자인 강국이다. 현대자동차와 삼성 휴대전화의 디자인을 보라. 다른 나라들로부터도 디자인 의뢰가 온다. 이런 역량이 있으면서도 우리 거리는 완전히 황폐화해 있다."

-어쩌다 그렇게 됐나.

"산업화와 치열한 경쟁을 거치면서 공공선을 위한 조화와 협력의 윤리를 몸에 익히지 못했다. 간판을 보라. 만인이 만인을 향해 상업적 메시지를 토해 내면서 아우성을 치는 전투장이다. 우리는 환경 전체를 규율할 기구도 없다. 길거리에는 중앙정부.지자체 등에서 상가번영회까지 제각각 설치해 놓은 시설물들이 난립해 있다. 전체 환경을 위한 측면에서 전혀 조율이 없다."

-어떤 도시는 자꾸 가보고 싶다. 공공디자인은 도시의 경쟁력과 일치하는가.

"프랑스의 문명철학자 기 소르망이 '한국은 이미지가 없는 나라'라고 말했다. 외국인들이 한국에 머물다 가더라도 머릿속에 뭘 가지고 가질 못한다. 무질서한 간판, 화장실 찾으며 고생한 경험만 갖고 돌아간다. 공공디자인은 창의적이고 쾌적한 삶의 공간을 만들어 국가 브랜드를 높이는 것이다."

한국적 감성 찾아 내야

-우리 지자체들도 이제 공공디자인의 중요성에 대해 눈을 뜨고 있지 않은가.

"중앙일보에'공공디자인 산책'연재가 시작된 이후 지자체들의 요청이 쇄도했다. 특강을 가서 보면 열기가 뜨거운 데 놀라게 된다. 지금이 중요한 시기다. 돈을 퍼부어 오히려 망쳐 놓지 않도록 세심한 노력이 필요하다."

-공공디자인은 대도시에만 필요한 것인가.

"공공디자인은 공기처럼 어디에나 있어야 한다. 서울에만 집중되면 안 된다. 산업디자인은 기본적으로 무국적이다. 한국의 휴대전화 기준과 미국 뉴욕의 휴대전화 기준이 거의 다르지 않다. 하지만 공공디자인은 지역적 특성이 강하다. 공공디자인은 지역적인 개념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공공디자인은 어떤 것이어야 하나.

"우리의 전통문화와 지역적 특수가치를 다 담아야 한다. 국민 감성.지향과 맞고 시민들의 관습적 행동 패턴을 지원할 수 있어야 한다. 이건 서울과 런던.뉴욕이 다 다르다. 한국인에 대한 연구, 우리 도시의 공기, 산.강과 같은 물리적 조건에 대한 연구가 함께 이뤄져야 우리만의 공공디자인을 찾을 수 있다."

정리=박신홍 기자

권영걸 교수는 …

경북 안동 출생으로 보성고와 서울대 미대 응용미술학과를 졸업했다. 미국 UCLA에서 디자인 석사, 고려대에서 공학박사(건축계획학) 학위를 받았다. 동덕여대.이화여대 교수를 거쳐 1998년부터 서울대 미대 디자인학부 교수(디자인 전공)로 재직 중이다. 현재 서울대 미대 학장과 한국공공디자인학회장.국회 공공디자인문화포럼 공동대표 등을 맡고 있다. 공간 및 도시 디자인에 관심을 갖고 세계 50여 개국 370개 도시를 돌며 지구촌 공간문화의 여러 유형을 탐사했다. 주요 저서로는 '공간디자인 16講' '한.중.일의 공간조영' '공간 속의 디자인, 디자인 속의 공간' 등이 있다.

사진=김태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