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두우시시각각

윤장호와 서해교전 전사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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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2002년 6월 29일 한국과 터키 간의 월드컵 축구 3, 4위전에 들떠있던 그 시각 서해에서는 우리 해군 고속정이 북한 경비정의 선제사격으로 벌집이 돼 가고 있었다. 여섯 명의 꽃다운 젊은이들이 서해바다 한가운데서 산화했다. 그러나 그들의 죽음은 정권으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했다.

그들의 장례는 이름뿐인 '해군장'으로 '허겁지겁 조용히' 치러졌다. 영결식에는 국무총리와 각료, 국방장관과 합참의장 누구도 참석하지 않았다. 여론이 들끓자 정부는 "해군참모총장이 장례위원장이어서 그 이상의 고위급 인사는 참석하지 않는 게 관례"라고 변명했다. '특전사장'으로 거행된 윤 하사의 영결식에 특전사령관보다 고위급인 국방장관과 합참의장.육군참모총장 등이 참석한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당시 국군 통수권자인 김대중(DJ) 대통령은 교전 다음날 월드컵 폐막식에 참석한다며 일본으로 떠나 영결식이 끝난 뒤에야 귀국했다. 이들을 위해서는 그 흔한 촛불집회 하나 열리지 않았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언감생심 방송 생중계가 있을 리 없었다.

죽어가면서도 장착된 포탄 700여 발을 모두 발사해 북한 경비정을 격퇴한 '전쟁 영웅'인 서해교전 전사자는 왜 윤 하사와 같은 예우를 받지 못했을까. 두 죽음을 둘러싼 권력 코드가 달랐기 때문이다.

서해교전은 DJ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필요성이 맞아떨어져 서둘러 묻혀졌다. 임기 말을 맞은 DJ는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의 불씨를 어떻게 하든 살려 김정일의 답방을 끌어내려 했고, 햇볕정책이 실패로 귀결되는 것만은 막고 싶어했다. 북한도 긴장 국면을 이어갈 이유가 없었다. 2001년 9.11 테러 직후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을 무너뜨린 미국의 다음 공격 검토 대상 중 하나가 김정일 정권이었다. 더구나 미국의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2002년 초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기까지 했다. 북한은 서둘러 '유감'을 표명하고 장관급 회담 제의, 남북 통일축구대회 개최, 부산 아시안 게임 참가, 이산가족 면회소 설치 등의 유화 제스처를 쏟아내 놓았다. 이런 과정은 요즘 상황과 쌍둥이처럼 닮았다. 서해교전과 북한 핵실험 이후 우리 정부의 대응 자세와 북한의 유화 움직임 등이 그렇다. 남한의 대선 국면이라는 시기적 유사성도 있다.

윤 하사의 죽음에는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대립과 갈등 요인인 북한 변수가 빠져 있다. 그래서인지 추모하는 데에는 아무 이견이 없다. 그러나 추모하는 이유와 계산이 다르다. 정부는 윤 하사의 죽음이 철군의 계기가 되지 않도록 막아야 했다. 삐걱거리는 한.미 관계를 그나마 지탱해주고 있는 것이 이라크와 아프간 파병이다. 이라크에서 아들을 잃은 신디 시핸이 미국의 이라크 철군 운동에 불을 지폈듯 윤 하사의 부모가 한국의 시핸이 되도록 방치할 수 없었다. 진보 내지 좌파세력은 윤 하사의 희생을 철군 운동의 기폭제로 삼고 싶어한다. 파병 반대 촛불집회에 이어 13일엔 성명서, 17일엔 대규모 집회를 예고하고 있다.

국가를 지키기 위해, 또 국익을 위해 희생한 국민에게 명예와 존경을 보내고 합당한 예우를 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북한도 '혁명열사'니 '애국열사'니 하는 호칭을 부여하고 유족들에겐 최상의 교육기회와 물질적 지원을 한다고 한다. 그런데 서해교전 전사자의 아내가 조국의 외면과 국민의 무관심을 원망하며 이민을 떠나게 해서야 제대로 된 나라라고 할 수 있겠는가.

김두우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