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에 너무 어두운 수출 전선/오체영 경제부기자(취재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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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만약 어떤 가전업체가 수도꼭지 구멍 지름이 2㎝로 정해져있는 나라에 세탁기를 수출하면서 구멍지름이 1.5㎝인 호스를 붙여보냈다하자.
세탁기를 현지에서 팔 수 없게된 외국수입업체는 우리 수출업체에 항의한뒤 배상을 요구할 것이고 거래선을 끊으려할 것이 뻔한 일이다.
이렇게되면 수출업체는 오랜 시간과 공을 들여 가꿔놓은 수입선을 작은 실수 하나 때문에 잃게 되는 것이다.
쉽게 일어날성싶지 않은 이같은 일들이 우리의 수출전선에서 심심치 않게 일어나고 있다.
구멍이 3개인 플러그를 쓰는 나라에 구멍 2개짜리 플러그를 보낸업체,수출상대국의 표준규격과 다른 나사못을 보낸 업체….
이같은 실수는 상당수 해외정보에 어두운 중소기업에서 일어나지만 일부 국내 굴지의 대기업들도 이런 경험을 갖고 있다고 관계전문가들은 귀띔하고 있다.
그러나 이를 단순한 「실수」라 친다하더라도 아쉬운 점은 아직도 국내기업들이 규격문제에 대해 소홀하다는 점이다.
제품의 표준규격문제는 이제 수면밑에서 떠올라 새로운 수출장벽으로 부상하고 있는 것이 세계적인 추세다.
EC(유럽공동체)가 내년말까지 각종 제품에 대해 총 4천6백여종의 유럽규격(EN)제정을 서두르고 있고,세계적으로 연간 1천8백여회의 국제표준규격 관련회의가 열리고 있다.
국제표준규격이 달라지면 수출업체는 규격에 맞는 제품생산을 위해 설비투자를 해야하는등 부담이 가게 마련이다.
이에 따라 미국·일본은 EC본부인 브뤼셀에 표준화 전담인원을 상주시키고 외국기업들은 국제회의에 부지런히 참석하는등 외국정부·기업들의 국제표준규격제정을 둘러싼 경쟁은 치열해지고 있다.
우리나라도 오는 18∼25일 일본 동경에서 열리는 고화질 TV 규격회의(SC29)에 삼성·대우등 11개업체가 처음 참가키로 하는등 조금씩 눈을 뜨고 있지만 아직도 외국에 비해 미흡한 실정이다.
이미 국내 완구업계는 지난해부터 완구부품 규격 등이 EN71로 표준화 되자 대EC수출에 차질을 빚고 있다.
이제 또다시 「우루과이라운드의 우」를 범해서는 안될 것 같다.
지난 80년대초부터 우루과이라운드가 논의됐으나 강건너 불구경하듯 하다 뒤늦게 발등에 불이 떨어지자 허둥거리는 일은 국제규격문제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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