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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옛터를 가다|중앙일보·대육연 주관 학술기행(2)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고구려의 고도 국내성과 광개토왕릉비를 조사하기 위해 집안으로 가는 길은 예나 지금이나 쉬운 여정이 아니었다. 중국대륙을 한바퀴 돌아 통화에 도착한 조사단 일행은 통집공로를 따라 집안으로 향했다. 통화를 떠난지 4시간 남짓 지나 노령산맥의 줄기인 소야령을 넘자 멀리 압록강과 북한의 험준한 산악에 병풍처럼 둘러싸인 집안시가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 풍경은 장엄 그 자체였다. 왼쪽으로 눈에 익은 장군총을 보면서 조사단 일행은 드디어 고구려의 옛 도읍지에 도착했다는 안도와 기대로 흥분된 마음을 삭인 채 우산 기슭으로 새로 포장된 도로를 따라 집안시내로 들어섰다.
도중에 문득 가로수 사이로 멀리 광개토대왕의 능침으로 알려진 태왕릉의 잔해가 모습을 보였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최근 일절 공개되지 않고 있다는 안내원을 설득하여 그 모습을 원경에서나마 촬영할 수 있었던 것은 다행이었다. 태왕릉은 광개토왕릉비에서 5백m정도 떨어져 있는데 둘레가 2백64m로 장군총의 4배나 되는 거묘로 「원태왕릉안여산고여악」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태왕전이 발견된 이후 광개토대왕의 능으로 인정되고 있다. 최근의 비공개로 이미 정밀조사중에 있는듯 했다.

<태왕릉과는 5백m>
숙소인 취원빈관에 여장을 풀자 집안박물관의 신임관장인 경철화씨가 마중을 나왔다. 원래 이번 조사의 목적이 고분·산성등 각종 고구려 유적지 답사는 물론이지만 근 1백년간 한일학계의 최대 쟁점이 되어 왔던 광개토왕릉비에 대한 보다 과학적이고 정밀한 조사에 있었으므로 중국측의 협조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더욱이 앞서5월의 아시아 학회에 참가하였던 학자들을 통해 주최측에서 능비의 4m 이내에서는 사진찍는 것조차 금지했다는 소식을 들었던 터라 걱정이 앞섰으나 미리 친교가 있었던 경관장이 능비의 조사에 최대한 협조해주겠다는 말에 조사단은 일단 안도감을 느꼈다.
광개토왕릉비는 새삼 설명할 필요도 없이 위대한 정복군주였던 고구려의 제19대 임금인 광개토대왕의 흔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장수왕이 412년에 건립한 6.39m에 달하는 세계사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거대한 사면 석비다. 능비는 광개토대왕의 흔적을 기리기 위한 기념비이므로 그 연구는 당연히 고구려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어야 할 것이지만 그 동안의 연구는 능비가 19세기말 재발견된 이래 일본에 의해 고대 일본의 한반도 진출을 합리화하기 위한 근거로 변조 제시된 까닭에 주객이 전도되어 이에 대한 공방으로 한일간에 논쟁이 그치지 않았다.

<대형 비각속에 보호>
능비가 외부학계에 공개된 1984년 이후에도 일본의 경우 문제의 신묘년기사를 비롯한 능비의 문자가 변조되지 않았다는 왕건군씨등 중국학계의 발표가 있자 이를 기정사실화하는데 주력하고 있는 느낌을 주고 있으며 한국학계의 경우 현지조사를 시작하였으나 현실적 여건의 한계로 그저 능비를 현지에서 견학한 이상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실정에서 지질학자인 전희영박사를 대동한 이번 조사의 의의는 적지 않았다.
왜냐하면 한일학계를 막론하고 그동안 비문에 대한 많은 연구가 있어왔으나 실제로 비문연구의 기초가 되는 비석 자체의 성질과 비문의 변조여부를 밝힐 수 있는 비석의 재질에 대한 성분분석등의 과학적 조사는 전무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아침에 오회분의 고구려 벽화를 조사한 뒤 그 현란한 색채의 감흥을 간직한채 본격적으로 능비 조사에 들어갔다. 능비는 집안시 중심에서 동북쪽으로 약4km 떨어진 지점에 있었다. 현지의 중국인들은 대왕의 시호인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의 마지막 세글자를 본떠 호태왕비로 부르고 있었다. 능비는 성산인 우산과 같은 방향으로 세워진 까닭에 동쪽으로 45도 정도 치우친 동남향에서 서북향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1976년까지는 2층 비각속에 있었으나 지금은 82년에 새로 세운 단층의 대형비각속에 있으며, 비주위는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2중의 철책으로 보호되고 있었다.

<대석은 시멘트 발라>
원래는 비주위를 둘러싼 철책바깥에서만 관찰이나 촬영이 허용될 뿐이었으나 경관장의 호의로 우리 조사팀은 보호철책속에시 비의 형태와 비문 하나하나를 관찰·촬영할 수 있었다.
원래 능비는 대석과 비신의 두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현재는 화강암으로 된 대석 주위를 모두 콘크리트로 발라 거의 비신만을 관찰할 수 있을 뿐이었다. 비신은 우리가 흔히 보는 화강암이 아니라 방주형의 자연석에 약간의 인공을 가한 것으로 비문을 새긴 각이 깊고 재질이 부드러운 까닭에 마모되기가 쉽고 탁본을 뜨기가 어렵게 되어있다. 이러한 이유로 비문의 문자 판독에 오독이 생겼으며 극단적으로 좋은 형태의 탁본을 만들기 위해서 비문에 진흙을 바르거나 우회칠을 하기도하여 비문변조 문제를 둘러싸고 한일학계의 쟁점이 되어왔다. 현재에도 일부 문자 주위에는 석회의 흔적이 뚜렷했다.
먼저 전박사와 능비의 암석재질을 검사했다. 잠깐 동안의 검사에도 불구하고 능비는 놀랍게도 종래에 알려졌던 것과는 달리 응회암이 아니라 현무암질의 화산암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조사단 모두 그동안의 능비연구가 너무 안이했었다는 반성과 새로운 연구에의 가능성에대한 기대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한편 비의 파손을 막기 위해 중국측에서 5년에 한번씩 합성수지액을 주사하여 비를 보호한다고 하는데 현지에서 관찰한 결과 그 부분의 변색 흔적이 역력하여 비의 또다른 손상 원인이 될 것 같은 걱정이 앞섰으며, 오랜 풍화와 여러 차례의 탁본등으로 현재의 비면은 옛사진에서 보는 것과는 달리 표면이 마모된 흔적이 뚜렷했다. 보다 과학적인 보호가 시급하다고 보여졌다. 문제의 신묘년기사의 경우 비문 제1면 상단에 있는 까닭에 육안으로 확인하기가 어려워 준비해 간 사다리를 놓고 관찰하려고 했으나 관람객이 붐비는 대낮인 탓인지 집안박물관측도 이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아 보다 상세한 조사는 이튿날 다시 하기로 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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