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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사람없는 「사회과학」서적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2면

달포 전에 곽말야선생의 중국 고대사상에 관한 책을 냈고 보름전에는 『러시아통사』를 출판했다. 6백50여 쪽과 8백여 쪽에 이르는 상당한 분량의 것이었고 기획에서 출판까지 각각 6년과 8년이 소요된 난산의 작업이었다. 이 글을 쓰는 새벽의 책상머리에서 그 두권의 책을 펼쳐보면서 나는 나의 출판업 15년 동안에 이루어진 1백 종류 이상의 사회과학서적들의 운명을 생각하고 있다.
곽말약 선생의 저서는 1백여 권, 러시아 통사는 10여권이 판매된 이즈음의 사태를 당해, 나는 나의 1백여종의 이른바 사회과학서적의 대부분의 지형이나 필름들이 이제는 재생쓰레기 대접도 받지 못하게 된 현실을 비탄할 뿐이다. 물론 책도 생명이 있는 것이요, 특히 사회현상을 다룬 사회과학 서적의 경우는 더욱 생명이 한정적일 것이다.
지난 20여년동안, 갈등과 암흑의 한국역사 현장에서 기묘하기조차한 한국적 작명의 「사회과학」책은 비정상적인 성장을 했다. 발행 종수도, 발행부수도 엄청났다. 이제 국가적으로는 민주화와 세계사적으로는 사회주의국가 쇠망의 진운 및 전망속에서 과거의 역사적 소산이었던 좌익 이데올로기 편향의 「사회과학」책의 쇠퇴는 당연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제의 심각성은 기존의 비이데올로기적인 「사회과학」책뿐만 아니라 현재 생산되고 있는 기초 학술서적까지 전혀 입질의 기미도 찾아볼수 없다는 데에 있다. 그 책임은 1차적으로는 독서인들의 독서의욕을 자극하지 못하는 기획역량 부족의 출판업자에게, 2차적으로는 참으로 한정된 종수의 학술서적도 수용하지 못하는 학계에 있을 것이다. 물론 초판 1천∼2천권도 소화하지 못하는 이 사회의 제도적 불비, 특히 도서관의 제도적 불비 또한 그 근본 이유중 하나다.
설사 그렇기로서니 1백만여명의 대학생이 있고 과소비로 비만증에 시달리는 이사회가 책에 대해서는 이래도 되는지, 참으로 이래도 되는지 반문하고 싶다. 단1권이 소용되더라도 사회의 근본과 진보에 궁극적으로 도움이 된다면 출판하는 것이 출판인의 직업적 소명일진대, 이러한 반문은 들려오지 않을 메아리임이 분명하다.
대중소비사회에서는 소비상품으로서의 책이 책시장의 대종이 되는 것은 정한 이치다. 그러나 사회의 근본과 발전의 초석이 될 수 있는 책도 단순재생산은 가능할 만큼 용처가 있어야 할것이다. 정녕 이래도 되는가. 이 반문을 하는 출판업자가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미력하나마 다해 노력하며 긍정적 인생관과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왔다고 스스로 믿는다면 이 반문이 출판업자의 고단한 반문에 불과하다고만 할 수 있겠는가.
가을걷이가 끝난 들녘의 끝머리를 향해 산음의 계곡을 훑어내린 비풍이 참우를 몰아 달려갈 날도 이제 오늘·내일이다. 그러나 조붓한 어깨의 들길섶에는 민들레씨앗이 개똥 속에서 봄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책을 만드는 나의 희망은 권정생선생(아동문학가)의 「민들레씨앗의 소망」은 물론이고 과학적인 마르크스 선생의 「밀알의 소망」과 함께 리카도선생의 밀알의 그것도 똑같이 이루어질 수 있는 책의 봄이 이 비풍참우의 늦가을이 가고 겨울이 가면 다시 찾아오리라는 것이다.
70년대와 80년대는 암흑시대였으나 책에 있어선 분명히 감격시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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