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영 가족 소설 - 즐거운 나의 집 [1부] 여름 ⑦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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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그림=김태헌

"위녕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안 되겠니? 그러니까 이제 곧 고3이 되는데 대학 가서 엄마한테 가도 늦지 않을 테고. 그러니까."

아빠는 수화기 저쪽에서 천천히 그러나 간절한 어투로 말했다. 물론 거기에는 아빠가 언제나 나 때문에 이 세상의 모든 번거로운, 고민이란 고민은 다 해야 한다는 짜증도 조금 배어 있었다.

"그래서 가는 거야. 이제 고3이 되면 전학도 할 수 없어서. 아빠…, 나 10대의 마지막 시절을 엄마와 함께 보내게 해줘."

아빠의 가느다란 한숨소리가 수화기 저쪽에서 들려왔다. 내가 굳이 아빠를 만나지 않고 전화를 통해 말을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장면 때문이었다. 내가 이렇게 고집을 부릴 때마다 아빠는 내 얼굴에서 엄마를 찾고 있었다. 언제나 나는 그걸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아빠의 고통은, 그리고 분노는 아마도 두 배가 될지도 모른다. 나는 그게 싫었다.

"할머니가 서운해하시지 않겠니? 네가 떠나고 나면 할머니 혼자인데."

"할머니 곧 미국 큰아빠네로 가신대…. 어디 있든 네가 행복하면 그것이 우리 집이라고 할머니가 그랬어."

아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떠난다는 딸을 잡는 핑계가 겨우 할머니의 외로움이라는 것에 스스로도 자존심이 상하는 것 같았다.

"엄마는 너와 비슷한 사람이야. 내가 보기에는 많이 닮았지. 아니 거의 같지. 성격이 비슷한 사람끼리 한집에 살면 부딪혀. 둘 다 자기의 생각이……. 아빠는 그게 걱정인 거야."

부모가 이혼해서 살면 좋은 점도 분명 있긴 하다. 첫째는 우선 용돈의 액수가 두둑해진다는 것이다. 두 사람이 서로 전화 통화로 내 용돈의 액수를 의논할 염려가 없으니까. 엄마 쪽은 나를 의심하고 얼마간 통제하기 위해 그럴 의향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아빠로서는 다시 태어나지 않는 한 그런 염려는 없다. 그런 때는 이혼한 부모가 사이가 좋았으면 큰일 날 뻔했다는 생각도 든다. 나는 그냥 양쪽 부모에게 가서 약간 슬프고 배고픈 표정을 지으면서 "엄마 우리 반 혜지는 걔네 엄마가 참 이쁜 가방을 사줬더라"라고 하거나 "아빠, 요즘은 이상하게 공부가 잘 돼. 이미 푼 문제집을 자꾸 풀고 있어." 이런 말을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순간, 그러니까 아빠가 하려다가 말아버린 그 말 "둘 다 자기의 생각이…"의 말줄임표 속에 들어가는 상대방에 대한 비난은 이상하게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아빠는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넌 어쩌면 네 엄마랑 그렇게 똑같니? 자기의 생각이 옳다고 생각하면 남들의 시선은 아랑곳없이 제멋대로 행동하지."

한번은 이런 말을 하는 아빠에게 "그러는 아빠도 지금 그 생각이 옳다고 말하는 거잖아" 대꾸했다가 아빠가 하도 무서운 표정을 짓는 바람에 내가 입을 다물어버린 적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대신 아빠가 그런 말을 할 때 "글쎄 말이야. 코는 엄마를 닮고 성격이 아빠를 닮았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대꾸하는 법을 배웠다. 그럴 때 아빠는 그것이 내가 엄마의 성격을 비난하는 동시에 아빠의 성격을 칭찬하고 있다는 뜻을 재빨리 알아차리고 피식 웃곤 했다.

"성격이 다른 아빠랑도 부딪혔잖아."

"… 그래…, 그렇구나…. 그랬구나…."

아빠의 목소리는 슬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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