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의 바둑산책|불운의 기사 전자평 9 단|신병으로 결승전서 기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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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일본의 소임광일9단이 울화통이 터져 3, 4위전에 불참했다지만 중국의 전우평9단은 어째서 단판승부로 우승을 다투는 결승전에 나가지 않고 기권했을까.
우선 중국바둑계의 입장부터 살펴보자.
제1인자 운위평9단이 3년여전 「제1회 응창기배전결승5번승부」때 한국의 백훈현9단에게 2승3패로 역전패, 거의 차지했다 싶었던 우승을 놓친데다 작년에는「제3회 후지쓰배 결승」에서 임해봉9단에게 패퇴하여 또다시 준우승에 그침으로써 번번이 우승 문턱에서 좌절해오던 터에 이번 후지쓰배에서는 초반에 탈락하는 불운까지 겹쳐 초상집을 방불케하는 침울한 분위기였다.
그러나 크게 기대하지 않았던 신예 전우평9단이 뜻밖에도 일본기단의 쌍벽 무공하·소림광일을 차례로 쓰러뜨리는등 괴력을 발휘, 결승에 진출하면서 분위기가 일신, 잔칫집처럼 들떠있었다. 사실 전우평은 이번 「후지쓰기」에서 판을 거듭할수록 일취월장, 그 기량이 향상되었다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여서 그 기세대로라면 조치훈9단 마저 격파하고 우승을 차지할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데 호사다마라더니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중국인들의 가슴을 부풀게했던 전자평9단이 갑작스런 발병으로 결승전에 나가지 못할 줄이야…. 따라서 중국은 또 한번의 우승기회를 놓치는 불운을 겪었다.
전우평의 병명은 놀랍게도 「정신착란증」. 참으로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번에야말로 기필코 우승해야 한다』는 주위의 기대와 본인의 열원은 크나큰 강박관념·스트레스로 작용했고 그 압박감을 이기지 못한 전우평은 마침내 발작하기에 이르렀다는 얘기다.
자, 병명이 이러하니 사실대로 밝히지 못하고 「심한고열」운운으로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오송생9단 역시 필자의 집요한 질문공세에도 불구하고 끝내 입을 열지 않았음이니 중국인의 속이 깊다할 수밖에.
『목숨을 걸고 둔다』는 조치훈의 명언도 있거니와 『바둑 공부는 열심히 정도로는 충분치 않다. 아주 미쳐야만 한다』는 말이 있다. 한국바둑의 개척자 조남철선생은 『권투는 상대가 나의 머리를 때리는 경기지만 프로기사의 공식대국은 내가 내 머리를 강타하는 고된 작업』이라고 갈파한 적이 있다.
전우평은 비운의 천재기사다. 지금 그는 북경교외의 한 정신병원에 격리수용된채 치료를 받고있다.
자신의 전문분야에 미치도록 정열을 불사른 그 프로근성에 존경을 보냄과 아울러 그의 빠른 완쾌를 비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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