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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31)제86화 경성야설(66)조용만|건국동맹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우리가 이날이 올 것을 고대했고 이 때문에 우리 2천만 민족이 생명을 걸고 악전고투해온 것이지만, 그러나 이렇게 해방을 맞이하고 보니 앞으로 닥쳐올 일이 난감하였다. 그때는 38선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지만 어떤 형식으로 새 나라가 세워질는지 이것도 큰 문제였다.
아내는 동네사람들이 내일 정오에 중대방송이 있다고 하는데 무슨 방송일까 하고 궁금해하지만 해방이 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더라고 하였다.
더욱 충성심을 발휘해서 돈을 내놓으라고 하는 것일는지, 방공훈련을 열심히 하라는 것일는지 그런 것일테지 하고 무심히 여기고 있더라는 것이다.
그동안 전쟁에서 이기고 있다고만 선전해왔고 불리하단 말은 한마디도 안 해왔으니 백성들이 까맣게 모르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튿날 8월15일은 쾌청했다. 나는 일어나는 길로 계동 여운형 선생댁으로 달려갔다. 내가 살던 원서동과 계동은 아래로 새 길이 나서 통해 있었는데 원서동 동회옆 골목으로 들어가 언덕을 넘으면 계동이었다.
내가 언덕을 넘어서니까 언덕 위에 최용달·이강국·박문규 세 사람이 서있었다.
세분은 다 나의 대학선배로 경성대학 2회 졸업생이었다. 현민 유진오가 한 반 위였고 그 아랫반에 세 사람이 있었다.
이 네 사람은 대학 때 함께 경제연구회롤 조직했고 졸업 후에는 낙산구락부를 조직해 잡지 『신흥』을 발간하는 등 친밀한 교우관계를 가져왔다.
유진오가 가정관계로 이 세 사람과 멀어지자 세 사람은 정치운동에 깊숙이 들어갔다.
이 때에도 세 사람은 여운형과 함께 건국동맹을 조직하고 조선이 해방될 것에 대비해 정치운동을 비밀리에 계속해 오던 터라 해방의 날을 맞이하여 여운형 집에 모이게 된 것이다.
『어디 가?』
이강국이 나를 보자 큰소리로 불렀다.
『몽양선생댁에 가지말고 나한테 와서 무엇이고 물어봐. 이제부터는 내가 다 알려 줄테니까, 알았어.』
몽양은 여운형의 아우였고, 이제부터는 자신이 알려주겠다는 말에는 까닭이 있었다.
세 사람과 여운형이 건국동맹을 조직한 것은 그 해 봄인 듯싶었다.
2월에 미군이 일본의 이오지마(유황도)를 점령하고 4월에는 오키나와를 점령해서 일본에서는 본토결전을 부르짖게 될 만큼 패전이 가까워졌다.
오래 끌어봐야 겨울이 되면 일본이 손을 들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라는 게 우리들의 관측이었다.
이강국은 그전부터 내가 잘 아는 학교선배인데 그 해 봄부터 나를 자주 불러내 술을 사주었다.
그때는 술이 귀하였고 술집앞에서 줄을 서 기다려서 잘 걸려야 한 홉을 얻어먹었다.
그런데 이강국은 청진동 뒷골목에 있는 중국집 「대륙원」을 어떻게 삶아놓았는지 그가 들어가면 술을 얼마든지 주었다.
나는 술 얻어먹는 맛에 끌려나갔는데 이강국은 술을 마시면서 총독부측의 소식을 꼬치꼬치 캐물었다.
나는 신문사로 들어오는 소식을 걸리지 않을 정도로 알려주었다.
그때 우리들이 제일 무서워한 것은 조선사람 인텔리로 전쟁에 협력하지 않는 사람을 일제히 검거한다는 소문이었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이것은 헛소문이 아니어서 총독부에서는 소련이 전쟁을 시작하면 바로 조선인텔리를 모두 검거해 총살할 계획이었다.
그래서 명부를 다 작성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소문이 나 이강국은 여기에 대한 정보를 캐물었다.
그러나 그때 총독부에 출입하는 외근기자도, 조선군 사령부에 출입하는 기자들도 전연 아는 기색이 아니었다.
내가 일부러 그들 외근기자에게 알고도 말을 안하는 게 아니냐고 해도 정말로 모르는 눈치였다.
다만 보호관찰에 걸려있는 사람들은 혹시 그럴는지 모른다고만 하였다.
그밖에 이강국은 내게 여러 가지 일을 물었는데 나한테서 들은 정보가 혹시 그들에게 무슨 도움이 되었는지, 나는 귀한 술만 많이 얻어먹은 게 아닌지 하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
어쨌든 이 때문에 이강국이 이제부터는 내가 다 알려줄게 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이때 이강국은 나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
오늘 오전7시에 여운형이 엔도(원등)정무총감과 만나 첫째 오늘 안으로 전 조선감옥에 갇혀있는 모든 정치·경제범을 석방할 것, 둘째 서울시민이 3개월간 먹을 식량을 확보해줄 것, 셋째 오늘부터의 내 행동을 방해하지 말 것을 요구할 것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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