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4528)제86화 경성야화(63)조용만|매일신보 인사파동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고등경찰관 출신인 이성근을 매일신보 사장으로 임명한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최린 사장과 이상협 부사장은 총독정치에 협력하는 체하여 친일파란 패를 차게 되었지만 근본은 민족주의자라 무슨 짓을 할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이 사람들이 매일신보의 최고간부로 있는 동안에 두 가지 사건이 생겼다.
첫째로 1939년에 편집국장 유광렬이 남경에 가서 사건을 일으켰다. 일본은 1939년에 장개석 정부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언명하고 따로 왕조명을 시켜서 남경정부를 만들게 하였다.
매일신보에서는 남경정부의 성립을 축하하기 위해서 편집국장 유광렬을 신용욱의 비행기에 태워서 남경에 갔다오게 하였다.
유광렬은 왕조명과의 회견석상에서 『조선 청년은 손문주의에 찬동하는 사람이 많으므로 앞으로 조선과 중국의 청년이 연결하기를 바란다』고 말해버렸다.
이 발언이 남경의 일본군 당국과 조선총독부 경무국 파견원의 보고로 알려져서 비난을 받게 되었다.
이 때문에 유광렬은 귀국하자마자 파면되었다.
다음으로 l940년 매일신보신년호의 학예면에 「전쟁과 문학」라는 제목으로 김진섭의 수필이 실렸는데 그 내용이 반전사상을 고취하였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처음 녹기연맹(녹기연맹)이라는 총독부 어용단체의 조신인 직원이 발견해서 조선군 보도부의 가마(포)대좌에게 보고했다.
가마란 자는 정훈이라는 조선사람인데 일본인 부인의 집에 양자로 들어가서 가마란 성을 들인 악질 군인이었다.
이 자가 총독부에 와서 떠드는 바람에 사건이 확대되어서 학예부장이었던 필자는 파면되었다.
이 두 사건이 모두 민족주의자였다가 변절한 최린과 이상협의 사장·부사장 시대에 일어난 일이므로 사장부터 철저한 친일분자로 앉혀 놓아야겠다고 총독부는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고등경찰 출신의 가네가와(금천성·본명 이성근)를 최적임자로 생각, 사장에 임명한 것이다.
유광렬과 나는 똑같이 파면되었지만 나는 죄가 가볍다고 생각되었던지 다시 촉탁으로 채용되어서 사진순보(사진순보)의 편집을 맡게 되었다.
4층 사진부 옆방에서 옛날 같이 있던 학예부원들과 일을 하게되었다.
간부들은 이 방을 후데이센진(부령선인·일본말로 반항정인 조선인이란 뜻)의 소굴이라고 해서 몹시 미워하고 감시하였다.
나는 가네가와 사장과 동대문경찰서강을 지낸 일본인 전무한테 툭하먼 불려가서 훈계를 들었다.
사실 이 방은 신문사에서 제일 후미지고 외부와 연락이 없는 방이라 사내의 불평분자들이 모여서 떠들어대고 월요일마다 있던 조회에도 나가지 않고 일본이 언제 망하느냐고 욕설만 하고 앉았다.
하는 일은 일선장병들의 노고, 총후(총후·국내라는 뜻) 국민들의 진충보국 이야기를 사진·글·학보로 만들어서 열흘마다 순간(순간)으로 발행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암흑시대의 우리들의 생활상이었다.
l943년말이 되면서부터 전황이 더욱 현저하게 불리해졌다.
6월의 마리아나 해전에서 일본해군이 전멸했고, 7월에는 사이판·괌·데니언의 각 섬들에서 전면 패퇴했다.
이 섬들을 점령한 미공군은 손쉽게 일본본토를 폭격할 수 있게되었다.
마침내 일본은 미군의 본토상륙에 대비해서 국민총무장을 서두르게 되었다.
관청은 토요일·일요일이 없이 매일 근무하라고 했고, 전면징용을 실시해서 각처의 군수공장과 광산으로 젊은 사람을 마구 잡아다가 강제노동을 시켰다.
북해도 탄광이나 사할린 또는 멀리 남양군도·태국·버마 등지로 보내 고된 노동을 시켰다.
잘 먹이지도 않고 위생시설이 나쁜 곳에서 개·돼지 취급으로 혹사만 하므로 많은 노무자들이 죽어갔다.
더 비참한 것은 젊은 여자들을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속여 일본군위안부로 끌어가 육신을 썩히고 만리 이국에서 죽게 한 것이었다.
사이판 군도가 함락될 때에 일본 군인들과 함께 죄 없는 우리나라 위안부들이 많이 죽었다.
처음에는 숨겨서 하다가 44년8월에는 공공연하게 여자정신대 근무령을 내려서 만l2세 이상 40세 이하의 배우자 없는 여성을 대량으로 연행해서 이국의 원혼이 되게 하였다. <고려대 명예교수>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