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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순교마을 성지로 새 단장|경북칠곡군 득멸이 한티고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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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대구∼안동간 국도를 따라 북서쪽으로 12km쯤 떨어진 팔공산자락의 첩첩산중.
경북칠곡군동명면득명리 속칭 한티고개엔 초가 10여채의 취락인 하늘밑 동네가 있다.
깊은 산골짜기를 굽이굽이 돌아가는 길목에 띄엄띄엄 이끼 낀 돌십자가와 낡은 비목이 외롭게 서있는 한티마을.
이곳이 한국가톨릭 2백년사에 빼놓을 수 없는 순교의 마을이다.
아직도 옹기조각과 숯굴이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이곳 성지에 최근 선현들의 넋을 기리는 「피정의 집」이 세워졌다.
가톨릭대구대교구(교구장 이문희 대주교)가 한국천주교회 2백주년 기념사업으로 83년부터 추진해온 한티성지 개발사업은 그동안 순교의 현장인 한티마을 부지확보에 어려움이 많아 8년만인 지난달 25일 높이 14m의 대형 십자가상과 「피정의 집」을 준공, 문을 열었다.
대지 7백73평에 지하2층, 지상5층, 연건평 1천9백10평 규모의 철근콘크리트에 빨간 벽돌로 외벽을 싼 「피정의 집」은 고풍스런 중세 가톨릭 건축양식을 되살렸다.
「피정의 집」은 박해당시 가톨릭신자들의 은신처이던 한티고개와 신나무골의 순교역사를 되새기고 오늘의 가톨릭을 일으킨 순교자들의 영혼을 기리는 피정 및 연수를 위한 건물.
「한티」는 본디 큰 고개로 불리던 경상도 사투리였으나 박해당시부터 가톨릭신자들 사이에 『한데 모여 산다』는 뜻으로 전해진 교우촌.
한국가톨릭이 막 꽃망울을 터뜨리려던 조선조 제23대 순조원년(1801년)에 당시 세도를 잡은 벽파가 수렴청정을 하던 정순왕후를 등에 업고 천주교도가 많은 남인시파를 탄압한 최초의 천주교박해가 시작된다.
중국에서 영세를 받고 돌아와 전교하던 이승훈을 비롯해 정약종·이가환·권철신·홍교만 등 남인들과 중국인신부 주문모를 처형하고 정약전·약용형제를 귀양보내는 참극이 빚어졌던 것.
이른바 신유박해.
이후 서울·경기도·충청도지방의 많은 신자들이 경상도산간지방인 청송노내산(청송군안덕면노내리)·영양머루산(영양군석보면포산리)등지로 숨어들어 교우촌을 이루고 살았다.
이곳 한티고개(해발 6백m)에 신자들이 숨어살기 시작한 것은 을해(1814)·정해(1827)박해 등 2대박해 때로 추정된다.
당시 대구관덕정·장대벌(봉덕동)·날뫼(비산동)등 3대 형장에 끌려온 신자들이 모두 참혹하게 처형되자 그 가족들이 대구인근의 안전지대를 찾아나선 곳이 한티고개였던 것.
이들은 주로 옹기와 도자기를 굽고 화전을 일궈 살았으나 이후 40여년간 한티마을엔 네 차례에 걸쳐 포졸들의 습격을 받아 쑥밭으로 변했다.
1868년 봄엔 한티마을에 포졸들이 덮쳐 배교를 거부한 30여명의 신자들을 공초(공초) 절차도 없이 그 자리에서 처형하는 등 수난이 잇따랐으며 현재 「피정의 집」주변에 이들의 분묘 37기가 남아있다.
이 같은 순교의 현장에 1백여년이 지나 성지개발사업이 이루어지고 전국의 성직자와 수도자·평신도 등 참배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아 새로운 가톨릭 성지로 각광받고 있다.
【대구=홍권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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