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측서 유연성 보여 “일단 숨통”/4차 남북 총리회담 결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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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북의 대일·대미 접근 필요성이 촉매역할/내용엔 아직 거리… 「단일안 합의」가 숙제
제4차 남북 고위급회담이 「합의서 형식」에 의견일치를 보고,여기에 담을 내용에 대해선 판문점 대표접촉을 통해 계속 절충을 벌인다는 합의를 끌어내고 25일 폐막됐다.
이번 합의는 그 자체로서는 「미미한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으나 지극히 소모적이고 대결적이었던 지금까지의 회담양상에 비추어 볼때 그 의미는 자못 크다고 볼 수 있다.
상대방이 수용하기 어려운 주장을 되풀이만 해 교착상태에 빠졌던 고위급회담에 숨통을 터주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판문점에서 대표 접촉을 계속 갖기로 함으로써 공식회담 석상에서 보다 「깊숙한 얘기」를 나눌 수 있는 통로가 구축된 것은 상당히 의미있는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특히 우리측이 바라던 바가 실현된 것으로 양측이 처한 복잡 미묘한 대내외 정세에 비추어 앞으로 이 채널의 활용방안이 주목된다.
이번 회담에서 양측은 불가침선언등 쟁점사항에 대해 기존입장을 고수하면서도 회담자세와 관련,긍정적 차원에서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무언가 합의를 찾아보려는 노력을 역력히 보여준 점이 바로 그것이다.
우선 양측은 합의서 채택과 관련,서로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했다면서 각각 1개의 합의서안을 제시했다.
합의서 명칭 등을 논의하기 위한 실무접촉을 심야까지 벌인 것도 이례적인데다 서로 양보할 것은 양보해 합의를 끌어내는 유연성을 발휘했다.
특히 북측은 이번 회담에서 종전과는 달리 융통성있는 대화자세를 보여주었다.
연형묵 총리가 제시한 합의서 내용을 보면 국가보안법철폐를 겨냥한 「법적·제도적 장애 제거」라는 문제가 삭제됐고 남측안이었던 「이산가족문제」「파괴·전복행위 포기」 조항이 첨가됐다.
또 북측은 비핵지대화선언이나 팀스피리트훈련을 합의문안 협상에 연계하지 않겠다고 분명히 밝혔다.
이같이 남북이 이번 회담에서 신축성을 발휘,하나의 합의를 끌어낸데에는 이에 대한 나름대로의 수요가 각각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북한은 그동안 고위급회담에선 「마지못해 임한다」는 인상을 주었다.
이 회담이 대일수교나 대미관계 개선의 전제조건인데다 중·소의 권유도 있어 응하기는 하나 이는 각계각층간의 정치협상회의라는 그들의 기본 대남 전략과 상충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한은 이번 회담을 계기로 고위급회담에 대한 전략을 일부 수정할 필요가 있다는 방침을 정한 것으로 보인다.
즉 남측 당국과의 대화에서 무언가 「의미있는 진전」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대일수교 교섭을 가속화하고 대미관계 개선에 필요한 전제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한 뜻이 크지만 아울러 남북 교류 자체에도 실질적인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북한의 이같은 자세변화는 김일성 주석의 중국방문 결과가 반영된 점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한 당국자는 『이번 회담 양상을 보면 합의에 접근하려는 북측 상층부의 희망이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남측도 「합의」에 대한 수요가 있기는 마찬가지다.
정상회담을 염두에 두고 있는 남측으로서는 고위급회담에서 합의를 축적하고 장외 채널을 마련하길 절실히 원했었다.
이같은 배경에서 남북이 「합의서 형식」에는 합의를 이루었으나 내용에서도 합의를 볼지에 대해서는 그 전망이 불투명하다.
특히 24일의 비공개회의에서 북측이 보여준 태도를 보면 더욱 그렇다.
남북간 평화체제 구축등 남측이 합의문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제시한 사항들에 대해 북측은 「그런 말은 꺼내지도 말라」는 식으로 강한 거부자세를 나타냈다.
이렇게 볼때 판문점 대표접촉은 진통을 겪을 것을로 보인다.
그러나 이번 회담에서 북측이 보여준 유연성이 지속될 전망도 없지 않아 합의가능성을 전적으로 배제하지 못하고 있다.
고위급회담 북측 대표인 김정우 대외사업부 부부장이 두만강하류 개발사업에 한국측 참여가 가능하다고 밝힌 점이나 북측이 남북경제협력 방안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 것 등이 그런 조짐들이다.
이같은 언급은 지금까지의 남북관계상 매우 이례적인 발언으로 주목된다.
이같이 북한의 변화되는 모습은 11월로 예정된 제5차 대일 수교회담,12월 부시 미 대통령의 방한결과에 따라 가닥이 잡힐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남북간의 의견이 맞아떨어질 경우 경제협력이나 군사당국자간의 직통전화설치 등 양측안의 공통분야에서 합의를 볼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이런 점에서 서동권 안기부장이 국회답변에서 『북측 주장은 우리측에서 대부분 수용할 수 있는 것』이라고 언급한 대목은 주목된다.
결국 이번 4차 회담은 양측이 상대방에 대한 기본인식,주변정세를 보는 시각에서는 현격한 거리감을 보여주었으나 분단후 처음으로 당국간에 실질 논의의 장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진전」의 시작이라고 평가된다.<안희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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