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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밀려드는 개방 물결|기차엔 대만인 여행객 북적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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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이튿날 아침에 부현장이 와서 같이 아침식사를 하고 호텔마당에 내려가 보니 거기에는 수령7백년이라는 큰 「용」나무가 몇 그루 있고 작은 연못 옆에는 「위제구치」라는 주자의 친필을 새긴 큰 비석이 서있다. 위제는 주자의 부친 주송의 호이고 구치는 옛 사무실이라는 뜻이다. 주송이 우계의 「현감」을 지냈는데, 주자는 현감의 아들로 8백60년 전에 이곳에서 태어났던 것이다.
내가 든 호텔 「위제빈관」이 바로 현감사무소였다.
그 비석 옆의 설명을 보니, 송의 건도칠년에 주자가 이곳을 방문해서 친필로 액자를 쓴 것이라고 한다. 지난 밤 부현장이 나와 만찬을 했을 때, 왜 이곳이 주자 부친의 감영 옛터라는 것을 말하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곰곰 생각해보니 결국 그는 주자와 그 부친에 대해별로 관심이 없었던 때문인 듯 했다.
부현장 일행이 우리를 「방무방당일감개」의 유명한 시를 낳게 한 샘터와 그 샘터가 흘러들어 이루어진 연못으로 안내했다. 샘터 옆에는 활수고천이라는 아담한 비각이 있었고, 샘물이 연못으로 들어가는 곳에 「거청여허」라고 쓴 돌문이 있다. 그 돌문을 지나 한참 내러가니 「남계서원」이라는 서원이었다. 그 입구에 「미희탄생지지」라는 인민정부가 세운 조그마한 비가 있다.

<주자 생가 있던 곳>
주자의 생가자리에 남계서원이 지어진 것이다. 그 서원은 옛날에는 규모가 지금 것의 3배정도 였다고 하는데, 지금의 것도 작지는 않다. 대문 안에는 중문이 있고 그것을 지나면 본당이 있는데, 거기에 주자의 소상, 주자의 친필을 목각한 것 몇 개, 그리고 그의 선조들의 초상과 약력이 쓰인 현판들이 걸려있다. 서원을 나오다가 중문 안의 대청에서 안내자가 나에게 방명록에 서명할 것을 청한다. 서명을 하고 나니, 이번에는 큰 화선지를 가지고 나와서 내게 휘호를 청한다. 나는 내가 아는 주자의 오언시 하나를 크게 써드렸다.
남계서원 뒤에는 주자의 독서정이 있고 그 부근에 수렁이 8백년이 된다는 「장」나무 두 그루가 있는데 주자가 심은 것이라고 한다. 「심낭」이라는 그의 아명을 따서 이 나무들의 이름을 「심낭장」이라는 작은 식석이 세워져있다.
위제구치의 바로 옆에 공자를 모신 「공묘」가 있다. 안내자에게 청하여 들어가 보니 중앙에 공자의 상을 모셔놓고 그 밑에 당구대가 하나 놓여있다. 공자와 당구경기는 잘 어울리지 않으나, 이런 어색한 광경이 중국에는 얼마든지 있어 놀랄 것이 없다.
벌써 오후 1시가 됐다. 오늘 중으로 주자가 학문연구를 하던 무이산으로 가야 한다. 부현장의 거가 남평으로 가는 길을 선도해준다. 비포장도로를 몇 시간 오르락내리락하는 험한 산길을 달려 남평시에 도착한다. 원래 여기를 오기 전에 나는 정 박사한테 복건생산골의 자연광경은 지금까지 보아온 중국 어디보다도 한국과 비슷한 점이 많을 것이라 한 적이 있다.
정 박사가 왜 그러냐고 묻기에 주자의 시문을 보면 그럴 것 같다고 대답했었다. 와보니 과연 이 부근 산천은 꼭 강원도 산골 같다. 남평시를 지나서 건양에 도착한 것이 6시쯤. 거기에 「고정」이라는 유적이 있다고 들었기에 가보기로 결심하고 투덜거리는 운전사를 달래 건양시의 서문 밖으로 나간다. 가보고 싶었던 이유는 고정은 주자가 71세로 타계했던 곳.

<퇴계 서적도 비치>
여러 번 물어서 그곳에 가보니 높이 약 15m, 너비 10m가량 되는 아주 웅장한 「정」자모양의 정교한 「고정서원」의 석문이 보인다. 석문의 중앙에 있는「은영」이라는 두 글자로 보아 서원은 황제가 만들어준 것임을 알 수 있다. 그 것을 뒷받침하듯 「고정서원」이라는 글자에는 권위와 무게가 실려있다. 이것이 서원의 정문인데, 지형으로 보아 도저히 이곳에 서원이 있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래서 여기저기 찾아보니 숲 속에서 작은 비가 발견됐다. 83년에 이곳 인민정부가 세운 것.
그 설명에 의하면 명의 가정10년(1531년)에 세워진 고정서원은 그 자리에 저수지가 만들어짐에 따라 철폐되고 그 문을 여기로 옮겼다고 되어있다. 원래의 서원은 아주 웅대한 것이었다고 쓰여있을 뿐, 이 서원이 누가 누구를 위해 왜 세워진 것인가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
그 날 밤은 무이산 만정빈관에서 일박.
다음날 무이산 구곡계의 상계에서 대로 만든 뗏목(벌)을 타고 제구곡에서 제일곡까지 내러 왔다. 지금까지 본 장강이나 악산에 비하면 산천의 규모가 작으나 그윽하고 아기자기한 절경이다.
빈관 바로 옆에 주희기념관이 있다.
주자의 일대기를 그림으로 그리고 탁본 등을 걸어놓고 있다. 아직 미완성인 상태라 그런지 여러 가지로 지금까지 본 기념관들만 못하다.
한국에 있는 신안 주씨들이 돈을 다소 기부하고 주씨 족보 한 질을 기증했다고 들었다. 기념관 서가에 들어가 보니 퇴계에 관한 한국 책 몇 권이 비치돼 있었다.
제오곡으로 다시 돌아가서 무이36봉 중 가장 수려하고, 무이구곡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천유봉으로 올라갔다. 천유봉 위에 또 마치 무능도원처럼 생긴 도원동까지 탐방한다. 중국은 어딜 가나 사람이 많은데 여기에는 인적도 드물다. 주자가 공부하던 「무이정사」는 후일에 자양서원이라고 개칭되었다.

<문화적으론 낙후>
그것이 제오곡 은병봉 밑에 있다고 하는데, 은마봉까지 갔지만 자양서원은 찾지 못했다. 안내자가 모른다고 하고 그것은 이미 없어졌다고 말하기에 그 말을 믿은 것이 잘못이었다. 나중에 문헌을 보니 지금도 자양서원은 그곳에 있는 것이 분명했다. 바로 그 부근을 헤매면서 거길 못 가본 것이 이번 여행 중 오직 하나의 유감으로 남았다.
자동차의 핸들 앞에 모택동의 사진을 부착하고 있는 우리의 운전기사는 성질이 급하고 운전이 난폭해서 복주로 돌아갈 일이 걱정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보따리를 들고 남평서 복주까지 기차로 가기로 했다. 남평 역에서 연좌두개를 사서 땀을 뻘뻘 흘리며 보따리를 들고 기차에 올랐다. 사천성에서는 연석은 텅텅 비어 있었는데 여기서는 완전히 만원이었다.
대만으로부터온 방문객이 많고, 이 연안지방에는 내륙지방보다 돈이 더 갈 돌기 때문이다. 분명히 돈은 더 잘 돌고 있지만 문화적으로는 지금까지 본 여러 군데만 못한 것 같다. 산골이라 그러겠지만 당나라 현종 때에 당에 편입됐다고 하는 이 지방은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후진지역이다. 아마 십중팔구 편견이겠지만 인간들의 질도 어딘지 모르게 사천성만 못한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모택동 영화 상영>
복주 역에 도착하니 많은 사람들이 바삐 서두르는 모양이 마치 서울역과 같았다. 리어카를 끄는 노인의 덕택으로 겨우 인파를 헤치고 택시를 잡았다. 호텔로 오는 도중 중국에 온 후 두 번째로 걸인 한사람을 보았다.
원래 나는 정 박사한테 적당한 기회가 있거든 중국의 영화 하나를 보도록 하자고 했었다. 복주에서의 마지막날 밤 정 박사가 바로 호텔 옆에 큰 극장이 있고 영화를 상영하고 있으니 보자고 한다. 모처럼 생긴 마지막 기회였다. 극장의 이름은 「대만대희원」.
여기서는 간판도 이제 사뭇 대만식이 많다. 영화는 중국공산당7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한 『모택동과 그의 자녀』. 큰 극장인데도 완전히 만원이었다. 영화의 내용은 모택동이 그의 자부를 보게된 경위, 그의 아들 모안영이 6·25때 전사한 경위 및 이에 관련된 모의 인간적 고뇌 등을 그린 것이었다. 예술적인 멋은 없는 작품이었다.
비행기가 떠나기 전 잠깐 시간을 이용하여 아편전쟁 때의 영웅 임칙서의 사당을 둘러보았다. 임칙서는 복주 출신으로 청의 건륭50년(1785년)에 탄생하여 높은 벼슬을 지냈다. 1839년에 그는 도광제의 흠차대신으로 홍콩에 파견되어 아편을 몰수소각, 그것이 아편전쟁을 유발하는 도화선이 뵀다.
그는 사후 문충공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임문충공사는 복주 시내의 한복판에 있다.

<임칙서 업적 기려>
중국식으로 기교를 다해 다듬어진 사당에는 그의 업적을 그린 자료가 진열되어 있다. 원래 이곳은 임공의 집이 있던 곳인데 여러 번의 우여곡절을 겪은 후 1982년에 크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국가의 생사에 관한 일에 어찌 일신의 화복을 생각할 수 있으랴」는 임공의 말이 대련으로 붙어있었다.
비행기는 11시에 홍콩으로 떠났다. 내려다보니 복주 부근의 산천이 매우 아름답다. 다만 한가지 범자형으로 된 시멘트로 싸 발린 새로 단장한 무덤들이 아름다운 산을 덮어 아주 보기가 좋지 않았다. 비행기 안에서 정 박사한테 말했다. 『이번 여행에 너무 수고를 많이 끼쳐서 미안하네. 이렇게 무사히 여행을 끝낼 수 있었던 것은 사실 모두 자네 덕택이었네』정박사가 말했다. 『아닙니다. 저도 여행 동안에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어쨌든 정 박사의 노고에 감사한다.
졸작칠절일수
무이산
삼삼곡곡수류청
오곡빈관정사적
담과수하청선성
(구곡의 물은 맑게 흐르고 삼십륙봉도 비 온 뒤 갰다. 오곡의 빈관은 정사의 옛터. 수박 먹는 나무 밑에 매미소리 듣노라) .
여행을 통하여 항상 떠오른 의문은 이 나라의 앞날은 어떻게 될까의 문제였다. 이에 대한 대답은 한마디로 『잘 모르겠다』는 것이다. 다시 박연암의 『열하일기』 생각이 난다. 거기에는 당시의 정세를 논한 「심세논」같은 논설도 있는데, 지금 세상은 하도 빨리 변하니 여기서는 그런 시도도 보류할 수밖에 없다. 소련이 붕괴되고 나니 이 나라의 처지와 국제관계도 격변하고 있다.
이 나라는 지금은 비교적 평온하고 발전속도도 빠르나 문제도 많다. 이 나라가 독자적인 모델로 일류국가가 된다면 그것은 인류역사상의 위업일 것이다. 장기적으로 이 나라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역시 교육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나라의 개방은 이제 기정사실이다.
중국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은 모든 다른 나라에 있어서도 그렇지만 훌륭한 지덕을 겸비한 지도자일 것이다. <시리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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