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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한 기술로 마법을 걸다

중앙일보

입력

이코노미스트 한 우물만 판 아흔 살의 코끼리. ‘더울 때는 찬 것을, 추울 때는 따끈한 것을’ 먹고자 하는 것은 우주선 타고 달에 놀러 갈 세상이 되더라도 변치 않을 인간의 소박한 바람이 아닐까? 과학의 발달도 어쩌면 인간이 가진 이런 소박한 욕구에서 시작되지는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이치카와 노리오 조지루시 대표.

어느 집에나 보온병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인공위성을 쏘아올려도 그런가 보다 하는 지금으로 보면 단순하기 짝이 없는 물건이지만 일본어로 ‘마법(마호)병’이라 하는 걸 보면 처음 이 물건이 발명되었을 때의 놀라움이 그대로 느껴져 우습다.

무슨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얘기인가 싶지만 이 속담 또한 담배라는 자체가 그리 오래된 물건이 아니라서 까마득한 옛날이라고 하기에 부적당한 것처럼, 보온병을 보고 사람들이 깜짝 놀라 ‘마법’이라 이름 붙인 것도 100년이 채 안된 일이다.

보온병이 생활 속에 들어오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1643년 이탈리아 수학·물리학자 에반젤리스타 도리첼리에 의해 진공이론이 나왔다. 이를 토대로 1892년 영국인 제임스 듀워가 진공 금속 도금병을 고안했다. 1904년 독일인이 이를 실용품으로 개발해, 그리스어로 뜨겁다는 뜻의 ‘테르모스·Thermos’라는 이름을 붙였다.

아마도 이 테르모스 병으로 보이는 것이 일본에 전해진 것은 1911년이라 한다. 이것을 파는 곳은 사냥용품점이었으니 그 용도가 극히 제한적이었던 것을 엿보게 한다. 이 물건의 첫 이름은 ‘보온·보냉 24시간 보증 진공병’이다.

‘마호병’으로 매출 600억 엔

그로부터 몇 년 후, 지금부터 이 기사의 대상이자 우리에게는 코끼리표로 더 익숙한 ‘조지루시사’가 태어났다.

1918년, 은(銀)자 이름이 든 형과 금(金)자 이름이 든 동생이 함께 오사카의 텐마(天滿)라는 지역에 ‘이치카와 형제상사’를 차렸다. 시골에서 오사카로 올라와 남의 가게에서 종살이하던 형제가 뭉친 것이다. 기술을 익혔던 동생은 보온병 속 유리병을 제조했고, 장사 전반을 익혀왔던 형은 납품을 맡았다.

텐마는 유리산업의 발상지로 손바닥만한 영세 제조사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던 곳이다. 제법 큰 도시라 인력이 넘쳐났다. 원래부터 지붕을 맞대고 비슷한 업체가 모여 있어 토박이 산업이 형성됐다. 서로의 기술교환이 이뤄지고, 항구에서 가까워 다른 지방이며 외국으로 보내기도 손쉬웠다.

첫 시작은 순탄하기 그지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보온병은 유럽이 본토지만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아시아 등에서 들어오는 오퍼를 일본이 대신 맡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산의 9할 이상이 수출용이었다. 화로가 곁에 있어 늘 끓는 물을 손 쉽게 얻을 수 있고, 수질이 괜찮은 일본에서는 썩 필요한 물건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후 30년. 보온병 속 유리병만 납품했다가 처음으로 보온병 완제품을 생산하면서 남의 하청업자가 아닌 자사의 이름을 상품에 새겨 넣게 된다.

▶오사카에있는 조지루시 본사.(좌) 조지루시의 핫라인 마이포트와 전기밭솥.(우)

1961년에는 회사 이름을 ‘조지루시(코끼리표) 마호병’(아직도 ‘마법’을 버리지 않고 있다)으로 바꾸고 본격적인 해외시장 개척에 나섰다. 원래부터 수요가 인도를 비롯한 아시아에 많아 코끼리의 신성하고 온순한 이미지를 빌려 등록상표로 택한 것이다.

일본 내의 수요도 이때부터 조금씩 늘기 시작했다. 주택이 서구화되면서 화로가 없어졌고 국민 대부분이 직장과 집이 분리된 직업을 갖게 되면서 밖에서도 먹을 수 있는 ‘따뜻함’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경영진은 여기서 기로에 서게 되었다. 아직 잘 팔리고 있는 보온병에 매달리느냐, 과학기술 발전을 피부로 느끼며 언젠가는 사양길로 갈 것을 예상해 다른 제품을 개발하느냐? 경영진의 선택은 후자였다. 그 후 전기밥솥을 개발해 1970년에 신상품을 선보였다. 3년 후 같은 기술을 바탕으로 전기포트도 발표한다.

포트 위의 단추를 누르기만 하면 뜨거운 물이 나오는 어느 집에나 있는 그 물병이다. 이 선택으로 조지루시는 완전히 기반을 잡아 세계적 기업으로 올라섰다. 현재의 매출액은 연 600억 엔으로 이 중 해외매출이 100억 엔쯤 된다. 종업원은 630명이다.

오로지 한 기술로 승부한다

그러나 조지루시는 세계적 기업이 되었다고 여러 분야에 손대지 않았다. 또한 거품경제로 돈이 남아돌아 사람들이 어디에 돈을 써야할지 몰라 모두 우왕좌왕 들떠있을 때도 다각경영에 유혹되지 않았다. 고지식할 정도의 경영에 대한 우직함은 비슷한 시기에 이 동네에서 같이 시작해 세계기업이 된 마쓰시타를 봐도 알 수 있다.

마쓰시타가 보온병이 아니라 같은 원리의 전구를 택해 기업을 일으켜 진공관이나 브라운관, 나아가 전기제품 모두를 떠맡은 매머드 기업으로 되어 가는 것을 보면서도, 그저 ‘찬 건 차게, 뜨거운 건 뜨겁게’ 노선만을 고수해왔다. 따라서 생산하는 제품 수도 그리 많지 않다. 하이테크를 추구하기보다는 있는 기술로 어떻게 하면 소비자에게 다가갈 수 있을까만 고심했다.

예를 들어 세상의 많은 제품이 오른손잡이를 기준으로 설계되었다면 뜨거운 물이 나오니 왼손잡이는 잘못하면 델 수도 있다. 그래서 누름단추를 한가운데 두게 되었다고 한다. 또 뜨거운 물을 금방 요리에 쓰기 위해 냄비를 직접 포트에 갖다 댈 수 있도록 냄비 곡선을 따라 포트 형태를 바꿔 요즘 포트 모양의 주류를 이루게 했다.

‘찬 건 차게, 뜨거운 건 뜨겁게’. 그 고마움을 잊기 쉽지만 혼자 사는 노인이나 환자에게는 사무칠 것이다. ‘코끼리표’의 그리 많지 않은 제품 중에는 식단 배달 용기가 있다. 밥그릇·국그릇·찬그릇이 골고루 들어 마치 한상 잘 차려 나온 것 같은 도시락이다. 혼자 사는 노인에게는 고마운 제품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특별한 기술은 필요치 않지만 소비자에 대한 애정이 있어야 가능한 발상이 아닐까 싶다.

조지루시는 수익성을 거의 도외시하고 이런 사업을 시작했다 한다. 이름하여 Hot-Line. 포트는 대부분의 가정에 있으니 그 포트의 물을 쓸 때마다 미리 정해놓은 사람에게 문자메시지가 가는 시스템이다. 인간은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양의 수분을 취하는 습성이 있으니 물의 양과 사용 시간이 평소와 다르다면 이상 신호라고 봐야 한다.

아침에 때가 되었는데 물을 쓴 흔적이 없다면 아직 못 일어나고 있다는 뜻이 되니 무슨 일이 있는지 당장에 의료기관이며 자식들이 뛰어 갈 수 있다. 이는 혼자 사는 노인이 사망한 지 두 달이 넘어 발견된 것에 충격받은 한 의사의 제안으로 시작된 프로젝트라 한다.

이 회사를 취재하다 보니 느낀 점이 많았다. 누가 오든 잠깐 차나 마시고 가라며 화로를 끼고 담소하던 시절과 누가 죽어도 모르는 세상이 되어버린 시간의 공존이다. 과연 인간이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회의가 든다. 달나라보다 이웃집이 더 멀어져 버렸다니.

코끼리표 회사는 곧 창업 100년을 맞는다. 그저 한길, 오로지 찬 건 찬대로, 따뜻한 건 따뜻한 채로 먹고자하는 인간의 소박한 욕망을 채워주는 생활용품에 사운을 걸고 있다. 요즘 같은 하이테크시대에 신제품을 개발해봐야 당장에 모조품이 나오지만 지금까지의 한결같음을 믿기에 소비자는 코끼리표를 고르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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