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채의 결에 켜켜이 쌓인 세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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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Colors Play Sweeping #64’. 70x120x3㎝. 나무판에 아크릴. 2006.

"한겨울 쌓인 눈을 대나무 비로 쓸어본다. 빗자루의 결이 생긴다. 그 속에서 흙과 낙엽이 층층이 묻어나온다. 그 속에 수십 결의 색이 있고 그림이 있다. 색을 쓸면서 논다. 쓸기의 결, 세월의 결, 색의 결이 나의 그림이다"(작가 노트 중에서).

서울 송현동 이화익 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중견작가 노정란(59)의 개인전은 색채의 결을 통해 풍경과 세월을 느끼게 한다. 전시 제목 '색 놀이-쓸기'에서 알 수 있듯 화면은 단순하다. 빗자루에 물감을 묻혀 옆으로 칠해나간 자국이 전부다. 하지만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그림을 들여다보라. 색채 위에 색채, 빗질 위에 덧씌운 빗질이 풍경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그 풍경은 보는 이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해질녘 유리창에 불타는 노을이기도 하고 고택의 마루에 차갑게 누워있는 거문고의 자태인가 하면 시퍼런 하늘 아래 적막에 잠겨있는 들판이기도 하다. 거기서 조금 더 들여다보라. 그러면 풍경은 서서히 가라앉고 색채가 다시 화면을 지배하는 걸 볼 수 있다. 변화의 시간이다. 색채는 풍경보다 더 기본적인 것, 세월의 모습을 드러낸다. 열 겹 스무 겹씩 덧칠한 색들은 비질의 앞과 뒤에서, 결과 결 사이에서 켜켜이 쌓인 시간으로 존재한다. 그 색채와 세월의 결은 아름답다. 일상을 지워버릴 때 비로소 드러나는 정열인가, 절제와 정열을 모두 벗어난 절대의 아름다움을 향한 수행인가. 6일까지. 02-730-7818.

조현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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