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20) 경성야사-제86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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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중국 측은 1937년 7욀「일에 국공합작의 노산회의를 열고 철저한 항일 전을 선언함으로써 중일전쟁은 전면전으로 확대되었다.
7월 28일에는 일본군에 의하여 북경이 점령되어 국민정부는 한구로 천도했다.
12월 13일에는 일본군이 남경을 점령한 후 야만적인 부녀자 대학살을 저질러서 악명을 세계에 떨쳤다.
미나미 조선총독은 점차로 전시체제를 강화하기 위하여 도문에서 관동군사령관과 만나 한국독립군의 공동 토벌문제를 협의하고 각 도에 전시체제령을 통첩하고 동시에 일본어의 사용 철저를 기하는 시책을 실시할 것을 명령하였다.
한가지 특기할 일은 노구교사건이 일어난 지 한달 밖에 안 되는 8월 20일에 조선 귀족 윤덕영의 부인 김복수 여사가 회장이 되어서 애국금차회를 결성한 것이다.
경기여고보 강당에서 발회식을 가진 이 애국단체는 귀족과 고관의 부인을 망라하고 그밖에 부일 협력의 각계 여류명사들을 회원으로 해서 『우리도 국민의 한 사람이다. 우리가 애용하는 금비녀야말로 이 초비상시의 국가를 위해서 바쳐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그리고 즉석에서 금비녀 3개·금반지 3개·금귀고리 2개·현금 8백89원을 헌납하였다.
이렇게 금비녀를 바치는 운동이 일어나자 금비녀· 금반지를 바치지 않고 그냥 끼고 다니는 사람은 비국민이라고 규탄하는 소리가 높아지고 심지어는 금반지를 그냥 끼고 다니는 사람을 향해서 손가락을 자르자고 덤비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이것은 금비녀·금반지를 가질 수 있는 부유층에 대한 일이지만 일은 점점 멀어져서 집에서 쓰는 은수저·놋그릇까지 공출하라는 명령을 내리기까지 되었다.
1937년 7월 노구교사건으로 중일전쟁이 터지기 직전인 4월에 종로경찰서에서 수양동지회 이사장인 주요한을 불러서 해산을 권고하였다.
수양동우회란 안창호가 조직한 홍사단의 국내조직으로서 인격수양을 목적으로 하는 친목단체이지 정치단체는 아니었다.
그러나 총독부에서는 그 단체의 구성인물들을 보아서 친목단체라고 표방했다지만 정치단체라고 보고 있었다.
그래서 주요한에게 자진해 산을 종용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주요한은 해산할 이유가 없을뿐더러 그런 일은 이사회에서 결정할 일이라고 당국의 요구를 거절하였다.
그러자 종로서 당국은 빨리 이사회를 열되 회의의 진행은 일본어를 사용해서 하라고 명령하였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주요한은 이광수에게 이 사실을 보고·협의하고 다시 이광수는 이를 안창호에게 통지하였다.
그때 대전감옥에서 가출옥되어 고향에서 정양 중이던 안창호는 즉각적으로 단안을 내리지 않고, 5월 20일께 상경한 뒤에 협의하자고 회답해왔다.
종로경찰서는 수양동우회에서 빨리 대답이 없자 일본어 사용을 반대하기 때문이라고 해석하고, 6월 6일을 기해서 전 회원을 일제 구속하였다.
경찰은 이들이 수양동우회가 독립운동단체라는 자백을 하도록 혹독한 고문을 가하였다.
홍사단의 규약 중에 『우리민족의 전도대업의 기초를 준비함』이란 귀절을 트집잡아서 이것은 분명히 독립운동을 말하는 것이라고 단정하고, 전 회원을 치안유지법 위반협의로 기소하였다.
전국에서 검거한 1백50명 중에서 두 사람은 고문 때문에 죽었고, 한 사람은 불구자가 되어 42명만이 검사국에 송치되었다.
그중 안창호는 병 보석으로 나와 1938년 3월 대학병원에서 별세하였다.
그러나 나머지 사람들은 4년 동안의 옥고를 치른 뒤 1941년에 모두 무죄로 출옥하였다.
안창호가 병 보석 중에 별세한 일은 국내외에 큰 충격을 주었다.
총독부에서는 만일을 염려해서 가족이외의 일체 다른 사람의 접근을 금하고 빨리 장례를 치르게 하였다. 직계 가족은 모두 미국에 있었다.
도산 안창호는 그 당시 민족의 큰 별이어서 그의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큰 슬픔을 주었다. 도산은 1932년 4월에 윤봉길 의사가 상해 홍구공원에서 폭탄을 던진 사건이 있은 다음날 한 어린이와의 약속을 지키려고 위험지구에 들어갔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때에 일본경찰의 경계가 엄중해 아무도 접근 할 수 없었고 1935년에 대전감옥에서 나온 뒤에도 좀체 대중 앞에 나타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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