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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인과 「청지기」의식(권영빈칼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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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내가 이루지 못한 꿈을 이 사람이 이뤄줬구나하는 대리 체험적 감동과 내 지금의 형편은 이렇지만 언젠가 나도 한번이라는 살아 있는 희망을 확인시켜주는게 있기 때문에 자수성가한 재벌 총수들의 자서전은 공전의 베스트 셀러가 된다. 89년에 발간되어 장안의 종이값을 올렸던 대우 김우중회장의 『세계는 넓고 할일은 많다』나 최근 선보인 현대 정주영 회장의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는 자서전을 읽노라면 그런 감회는 더욱 솟구친다.
비슷한 시대상황속에서 맨손으로 세계적 기업을 창출한 탓인지 두 자서전속에는 비슷한 대목이 많이 눈에 뜨인다. 이중 특히 흥미롭게도 두재벌 총수는 개인적 돈벌이에 대해서는 이구동성으로 반대하고 있고 기업은 재벌 개인의 소유물이 결코 아니라 국가와 국민을 위해 잠시 지키고 있는 「청지기」에 불과함을 역설하는데 주목하게 된다.
○재벌총수의 자서전
『경영자는 국가·사회로부터 기업을 수탁해서 관리하는 청지기일뿐이다.』(정주영 회고록 2백61쪽)
『내가 가진 재산의 소유자가 아니라 그저 청지기라는 의식,나의 재산은 내가 이 땅에 살고 있는 동안 잘 관리하고 잘 선용해야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고 하는 의식,나는 이 청지기 의식을 좋아한다』(김우중 경영철학 177쪽).
우리들이 선망해 마지않은 재벌총수들이 어째서 다투어 창고지기 관리인이 되기를 바라고 있는지 그 이유를 들어보자.
김회장은 『나는 소유에는 별관심이 없다. 기업인이 소유욕때문에 기업을 경영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사업을 크게 일으킨 대가로 얻는 성취의 기쁨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고 했다. 소유의 기쁨이 아니라 성취의 기쁨때문에 기업을 경영한다는 것이고 자신은 기업의 소유주가 아니라 전문 경영인일뿐이라는 것이다.
정회장의 청지기 의식도 대차가 없다. 『쌀가게를 하는 동안에는 내 재산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기업이 성장하면서는 일이 좋아 끊임 없이 일을 만들어 나갔을 뿐이지 재산을 늘리기 위해서나 첫째 부자가 되기 위해서라는 의식은 티끌만큼도 없었다.』때문에 그는 가장 큰 기업보다는 가장 깨끗한 기업의 개끗한 기업가로 기억되기를 바라고 있다.
두 재벌의 청지기 의식에서 우리가 중시해야할 대목은 과연 이분들의 소망이 얼마만큼 현실적으로 나타나고 있느냐에 쏠리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정회장의 자서전이 발간된 시점에서 현대그룹의 주식이 변칙거래되고 증여·탈세의 의혹이 있어 국세청의 세무사찰로 확대된 지금,과연 정주영 회장은 소유보다 성취를 위해 기업을 하는 깨끗한 청지기이고 깨끗한 기업인인가에 관심을 쏟지 않을 수 없다.
현대그룹의 재무구조로 보면 분명 현대는 국민의 기업이고 국가소유며 그룹총수는 청지기이고 관리인일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회사돈 1백원중 자기돈은 18원이고 82원은 은행대출·외상대금·해외차입금으로 남의 돈이라는 것이다. 그 액수가 무려 10조원을 넘고 있고 그 부채의 90%를 11개 계열사가 빌려 쓰고 있다면 이는 분명 국민이 피땀흘려 저축한 돈으로 기업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이대로라면 정회장 주장대로 자신은 국민을 대신한 위탁기업인일 뿐이다.
○82%가 국민의 돈
그러나 정회장일가가 전체 42개계열사의 주식을 68%가량 점유하고 있고 최근 현대의 주식이동이 가족중심의 상속과 증여를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었다는 보도를 믿는다면,관리인에 불과한 청지기가 주인 모르게 재산을 빼돌린다는 이야기 밖에 되지 않는다.
5·16을 기점으로 유신정권과 5공을 거치면서 이룩된 재벌기업의 성장과정이 깨끗한 기업경영과 맑은 돈만으로 이룩된 것이 아님을 많은 사람들은 짐작하고 있고 또 용인하고 있다. 개발독재·고도 경제성장정책의 경과조처로써 정경유착과 부의 편재는 어쩔 수 없었던 시대상황이었다고 용납하는 것이다. 이런 용인·용납에도 불구하고 시대가 바뀌었으면 경영의 방식과 소유의 형태는 이젠 좀 바뀌어야 한다는게 보통사람들의 소망인 것이다.
왜 우리에겐 존경할만한 기업가가 없고 누구나 주저하지 않고 손꼽을 깨끗한 경영자를 갖고 있지 못하는가. 정회장자신이 「재벌이라면 누구나 비리의 친구」라고 보는 사회풍토는 불식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정말 옳은 말씀이다. 보통사람들 또한 존경받는 기업가 한사람쯤 갖고 싶어한다. 왜 밤낮 우리들은 일제의 잔재를 청산해야한다면서 존경하는 기업가라면 마쓰시타·도요타·혼다라는 일본 기업가들을 꼽아야 하는지 부끄럽게 생각한다.
적어도 그들은 말만으로가 아니라 실천적으로 기업을 소유하지 않았고,세습하지 않았기 때문에 존경받는 것이다. 도요타는 전체주식의 1%,마쓰시타는 2.8%를 소유했을 뿐이고 혼다는 직계가족을 입사조차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죽음을 맞아 일본의 언론은 대대적으로 그를 추모하는 것이다.
○실천여부가 관심
보통사람들이 아들·딸을 앞에 두고 누구누구를 본받으라고 할 그런 기업가가 있기를 우리는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 이런 희망이 성취되려면 진정으로 청지기 의식에 실천적으로 투철한 재벌회장이 있어야 한다. 재벌을 보는 사랑과 미움의 엇갈린 시각에서 미움과 증오의 측면을 제거하려면 두 재벌 총수의 희망대로 소유보다는 성취에 도취하는 기업가가 되어야 할 것이고 부의 독점과 세습보다 깨끗한 청지기가 되는 일일 것이다.
자서전을 쓰기 위한 수식어나 미화용으로서가 아니라 보통사람 모두가 존경해 마지 않는 기업가로 영원히 기억되기 위해서도 두 재벌 총수의 희망사항이 실천적으로 성취되기를 기대하는 마음 간절하다.<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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