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창극 칼럼] 눈물이 없다면 희망도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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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얼마 전 취직 못한 젊은이들을 모아 좌담을 한 기사를 읽었다. 한 사람은 "점심시간쯤 시내엘 나가보면 목에다 회사 출입증을 걸고 다니는 직장인들을 보게 되면 왜 그리 멋있게 보이는지 부럽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만원 지하철에 시달리며 출근하는 그들 사이에 끼고 싶다"는 고백을 하고 있다. 최근의 실업보험 집계로는 명예퇴직이 이제 30대까지 내려왔다는 통계도 나와 있다. 카드빚 때문에 조마조마 파산만 기다리는 층도 수백만명에 달한다.

*** 대통령에게 실망하는 사람들

만일 이들이 며칠 전 노무현 대통령의 방송좌담을 들었다면 매우 실망했을 것이다. "한국만큼 희망있는 나라도 없다" "과거 정치대결이 심했을 때 경제가 위축된 일이 없다"니 이들의 고통을 아는지 모르는지, 대통령은 어느 나라에 사는지…. 사실 정치가 어떻고, 대선자금이 어떻고, 단식투쟁이 어떻고 하는 문제들이 절박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먼 나라 얘기다. 이들은 아마 대통령에게 배신감을 느꼈을지 모른다.

지난 대선에서 盧대통령을 찍은 사람들은 지금 경제적으로 가장 고통을 받고 있는 층일 것이다. 이들이 盧대통령을 찍은 이유는 "우리 같이 가난하고 없는 사람들의 처지를 더 잘 알 것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대학조차 가지 못한 그이기 때문에 누구보다 소외되고, 없는 사람들의 눈물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경제가 어려워지면 사회적 약자층에서 고통은 시작된다. 경제가 나쁘다 하여 재벌 집이 고생하는 것이 아니다. 직장이 있어 꼬박꼬박 월급받는 사람들은 실제 어려운 줄 잘 모른다. 눈물을 흘려야 할 사람들은 가난하여 버틸 힘이 없는 사람, 월급받을 기회조차 없어진 사람들이다. 물론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고통받는 사람들은 아래서 위로 점차 확대되어 갈 것이다. 盧대통령으로부터 보호를 기대했던 사람들이 오히려 이 시절 가장 먼저 내몰리고 있으니 참으로 역설이다. 盧대통령은 이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고 있을까.

나는 지도자란 눈물이 많아야 한다고 믿는다. 자기 지지자들, '코드'가 같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승리에 도취된 감격의 눈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구석구석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남모를 눈물을 흘리고 있는 사람들을 걱정하며 흘리는 눈물 말이다. 이렇게 스산한 겨울이 닥치면 지난 태풍 때 집을 잃고 컨테이너에서 생활하고 있는 수재민들은 얼마나 추울까, 대입시절이 다가오면 변변치 못한 성적 때문에 원서를 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부모의 심정은 어떨까. 1년간 1백번 취직시험을 보고도 떨어져 아직도 길을 헤매는 젊은이들은 얼마나 기가 죽어 있을까. 보지 않고, 만나지 않아도 이들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 되어 언제나 눈에 눈물이 고여 있는 그런 지도자 말이다.

눈물을 가지는 마음은 가난이 만들어 주지는 않는다. 가난했던 과거 때문에 오히려 눈물이 말랐을 수 있다. 새 정부 들어 근 1년간 정치는 왜 이렇게 계속 대결로만 가는가. 시위는 왜 이렇게 점점 더 살벌해지고 있는가. 왜 우리 사회는 점점 갈기갈기 찢어져 가는가. 미움과 증오만이 커지고 눈물은 말라 가는가.

빌 클린턴 정부에서 국무부 인권담당차관보를 지냈고 예일대 법대 학장으로 취임하게 될 고홍주씨의 형제자매들은 유복한 환경에서 모두 미국의 일류대학들을 졸업했다. 그 부모는 자녀들에게 "지금 우리 처지는 대단한 행운임을 절대로 잊지 말아라. 인생의 목표는 단순히 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다"라고 가르쳤다고 한다. 암살당한 로버트 케네디도 어린 자녀들과 식사 때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빵이 없어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음과 지금 우리가 누리는 행운을 잊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 눈물 닦아주는 리더가 나와야

환경이 유복했느냐, 어려웠느냐는 중요하지가 않다. 그가 배운 가치가 무엇이었으며, 지금 어떤 마음을 갖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내년 4월 총선만 관심있는 우리 정치지도자들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 그들의 눈에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면 지금은 비록 어렵더라도 우리에겐 희망이 있다. 그 눈물이 위로가 되어 다시 일어설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움과 증오가 정치하는 목적이고 원동력이라면 우리는 희망이 없다. 앞으로 우리는 더욱 어려운 처지를 헤매게 될 것이다.

문창극 논설위원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