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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미소 대결구도(탈핵시대:4)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소 믿은 미 핵감축 일방선언/미 주도 「새 세계질서」 가동
『소련이 서방을 침공하리라는 가정은 현실성이 없습니다. 소련은 더이상 현실적 위협이 될 수 없습니다.』
부시 미 대통령은 지난주말 미국의 일방적인 핵감축선언을 하면서 자신의 안보관을 이렇게 피력했다.
혹자는 미국이 영국이나 프랑스와 무기감축협상을 하지 않듯이 앞으로 동유럽 및 소련과도 무기감축협상이 필요없는 날이 곧 닥치리라고까지 전망하고 있다.
46년간 지속되던 두 강대국의 대결구도는 이번 부시의 선언으로 완전히 붕괴됐다고 평가되고 있다.
미국이 소련에 대한 신뢰가 없었다면 이같은 일방적 조치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소련이 쿠데타 실패이후 겪고 있는 내부적 변화로 말미암아 미국이 과감한 조치를 취할 수 있었다고도 한다.
한마디로 이번 조치는 두 강대국의 협조에 대한 분명한 확신과 미국을 위시한 서방세계의 미래에 대한 자신이 바탕이 되어 나온 것이다.
미국 국민들은 소련과 이러한 관계로 접어 들었다면 과연 「이제 미국의 적은 누구인가」라는 심각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2차대전 이후 지금까지 미국의 국가적 목표가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는 것이었다면 이제부터 미국이 추구해야할 세계전략으로서의 국방목표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리처드 체니 국방장관도 이제 미소간 핵대결의 시대는 지나간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
냉전을 넘어선 새시대의 질서를 부시 대통령은 「새로운 세계질서」로 부르고 있다.
체니 국방장관은 미국의 안보목표는 새로운 세계질서속에서 미국의 국가이익을 지켜 나가는 것이며 이를 위해 국방정책이 재정비돼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번 핵감축 선언도 이를 위한 장기적 포석의 하나다.
미국은 소련의 해체과정에서 우발적으로 빚어질지도 모르는 전술핵의 위협소지를 없애야하는 것은 물론 장기적으로는 양국이 보유하고 있는 2만여개의 전략핵도 과감히 감축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
이제 세계유일의 강대국이 된 미국으로서는 이같은 조치를 선도함으로써 「새로운 국제질서」의 도덕적 기반을 찾아야할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지상전술핵의 포기는 미 육군의 비핵화를 의미하는 것이며 이는 핵문제와 관련한 우방국과의 분쟁소지를 스스로 없애는 계기가 될 것이다.
소련의 침공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가 독일에서 전술핵을 사용하지 못하게끔 해온 독일정부의 요청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게 됐다. 한반도에서의 핵시비도 풀어갈 수 있는 계기가 됐다.
모든 미 함정으로부터 전략핵을 제외한 전술핵을 철수함으로써 미국은 핵적재함정의 기항을 둘러싸고 일어나던 일본·스칸디나비아·뉴질랜드 등과의 시비도 줄일 수 있게 됐다.
시야를 한반도로 좁혀보면 미국은 전술핵을 철수함으로써 핵개발을 서두르고 있는 북한에 제동을 걸 수 있는 명분을 갖게 됐다.
미국 스스로가 핵확산을 막기 위해 행동으로 나선 것으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이같은 주도가 어떤 결과로 나타날지는 아직 미지수다.
미국은 전략핵 분야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잠수함용 핵탄두(SLBM)의 감축은 제외시켜 놓고 있으며 소련은 자신이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다탄두핵미사일의 감축에 거부반응을 보이고 있다.
미국은 이같은 핵무기감축을 선언해 놓고도 B­2스텔스전폭기의 개발과 「별들의 전쟁」 프로그램은 포기치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하고 있다.
미국이 소련의 협조를 얻을 것으로 보고 이번에 일방적인 선언을 했으나 전체 핵무기체제로 볼때 감축은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일부 전문가들은 미국이 진정 세계를 핵위협에서 벗어나게 하려면 현재 양쪽이 갖고 있는 2만3천여개의 전략핵을 1천개씩으로 과감하게 줄일 생각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어쨌든 시작에 불과하기는 하나 이번 조치로 미국주도의 「새로운 세계질서」가 가동되기 시작했다는 평가는 해야 할 것이다.<워싱턴=문창극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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