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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개석 옛집까지 고스란히 보존|철저한 유적보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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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제갈공명이 옥야천리라고 한 성도평야는 중국의 유명한 곡창지대인데 이 평야의 상당부분이 인공으로 관개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2천 수백년전, 진나라의 지방장관이었던 이영이라는 사람이 민강의 물을 「도강언」이라는 인공섬으로 양분하여 산맥을 뚫어서 그중 한줄기를 성도평야로 흘러들게 한 것이다. 이 사실은『사기』『한서』에도 언급되어 있지만 근래에 이영의 석상과 기록이 출토됨으로써 그 경위가 더욱 확실하게 됐다. 옛날부터 이 지방사람들은 「이왕묘」라는 웅장한 사당을 지어서 이영부자의 공덕을 기리고 있다. 이 지역은 또 경치도 천하일품이어서 국내외의 많은 귀빈들이 자주 이 곳을 방문했다. 이왕묘에는 82년에 이 곳을 찾은 김일성 주석의 사진도 걸려 있었다.
손문은 그의 저서 『삼민주의』에서 중국에는 민족주의관념이 희박하여 중국인들은 마치 모래알처럼 단결이 안 된다고 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전혀 그렇지 않다. 중국인들은 은근히 단결심이 강하며 그들의 영웅이나 명인을 모시고 받드는 정성은 세계 어느 나라에도 못지 않다. 웅장한 이왕묘와 그 주변의 시설도본보기의 하나이다. 참고가 될 만한 것, 기념할만한 일체의 것을 다 잘 배치하고 있으며 중국어와 영어로 녹음한 영화를 통하여 이영의 공법을 설명하고 있다. 또 주변의 유원지에는 별별 놀이터를 다 마련해 놓고 있다.

<중공업단지 사천>
성도를 떠나던 날 아침 호텔에서 사천성 인민정부 경제연구중심 경제제도 개혁위원회 해홍처장과 면담했다. 인민정부의 외사관공실에 있는 박명실 여사가 통역을 해주었다. 박여사는 동북출신으로 함경도 말씨에 한자어는 중국식으로 쓰고 있었다. 해씨는 키가후리후리한 40대의 미남으로 사천경제와 앞으로의 전망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사천성은 전국에서 과학기술의 전문가가 가장 많으며 기계·전자·우주항공 등의 중공업도 이 지방에 집중되어 있고 인공위성의 제조시설과 가속기도 여기에 설치되어 있다고 한다. 나는 공업부문에서 소유와 경영의 구조를 앞으로 어떤 식으로 할 구상인가를 여러 번 물어보았으나 끝내 만족스러운 설명을 들을 수 없었다.
점심을 일찍 들고 옛날 전 촉국을 세운 「옥건」의 「영능」을 찾았다. 『매우 조그만 묘입니다』라는 말로 안내원 사씨가 미리 너무 기대하지 말 것을 부탁했다. 과연 북경의 명십삼능에 비하면 작기는 했으나 그래도 경주 박혁거세의 능보다 약 20배는 되는 것 같고, 현궁의 조직과 모양은 크고 정교하기 이를 데 없다.
잠시 시간이 남아 당대 여류시인 설도의 고리를 찾았다. 유유히 흐르는 민강 기슭에 「망강누」라는 높은 정자가 있고 거기에 바로 우리나라로 치면 꼭 황진이와 같은 그녀의 고리가 있다.
설도의 흔적으로 「설도정」이라는 우물이 있고, 이곳 사람들이 그녀가 대(죽)를 좋아했다고 해서 수백 가지의 대를 모은 것이 천하의 기관을 이루고 있다. 대껍질의 모양이 천차만별이란 것을 처음 알았다. 마디가 없고 마치백의 등처럼 생긴 대의 모양은 참으로 신기했다.
대리석으로 조각한 설도의 상과 작별하고 이제 대망의 중경으로 떠난다. 5시10분에 출발할 비행기가 6시40분으로 늦어졌다. 그 덕분에 공항대합실에서 콜린스라는 미국사람을 만났다. 75세 가량 되는 이 분은 중국말을 매우 잘했다. 선교사의 아들로 중국에서 태어나서 나의 「모교」인 미 버클리대에서 사회학박사학위를 취득한 분이었다. 중국이 제2의 고향인 그는 지금도 거의 해마다 중국을 방문한다고 한다. 그는 나에게 중국경제의 앞날을 어떻게 보느냐고 묻는다. 나는 『중국경제는 78년의 개방정책이후지금까지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지만 앞으로 태산같이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많은 시행착오를 겪을 것 같다』고 말했다. 해마다 들르는 중국에서 무엇이 달라지고 있느냐는 나의 물음에 대해 그는 『화장지가 좋아졌어요. 하하하』하면서 『중국을 다른 나라, 이를테면 미국이나 일본과 비교해서는 안됩니다. 40년 전의 중국과 지금의 중국을 비교해야 돼요. 40년 전 중국에는 굶어죽는 사람이 엄청났습니다. 그리고 어딜 가나 질병이 가득 차 있었지요. 그런데 지금은 어쨌든 이 많은 인구가 배곯지 않게 먹게 되고, 전국민의 건강이 보장돼 있으니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또』하며 그는 말을 잇는다. 『거의 쓰러져 가는 나라에 통일된 국가를 만든 것도 기적이지요. 중국사람들은 무엇이든지 자기네 식으로 하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중국에는 기독교가 빠르게 보급되고 있어 참 반갑습니다만 예배 보는 식, 심지어 찬송가도 이 사람들 식으로 하더구만요.』
비행기시간이 돼서 그와의 재미있는 대화가 중단된 것은 유감이었다.
중경비행장은 산 위에 자리잡고 있었다. 중경시의 주변은 매우 험준한 산악지대이다. 시내의 인구는 3백만 명이지만 주변까지 합하면 1천4백만 명이나 된다. 비행기가 도착한 것은 8시쯤. 중경으로 들어가는 도중의 산들은 꼭대기에 이르기까지 모두 빈틈없이 경작되고 있다.

<자전거 적은 중경>
시내가 가까워지는 언덕길에는 사람들이 홍수처럼 밀어닥치고 있다. 다른 도시와는 달리 중경에는 자전거의 수가 적다. 여기의 거리는 오르락내리락 평탄하지 않기 때문에 자전거 타기가 불편한 까닭이다.
중경에 도착한 이튿날 아침에 중경시 대외경제위원회의 직원인 손능씨와 중경가능기업공사의 총경리인 전홍녹씨가 우리를 안내하기 위해 호텔에 왔다. 두 사람은 전형적인 「좋은」 중국사람들.
가장 가보고 싶은 곳이 항일전쟁 때의 대한민국임시정부자리였다. 여기를 방문할 계획으로 북경에서부터 미리 여행사에 안내를 부탁했는데 중국측에 의사가 갈 전달되지 않았던 것 같다. 손씨와 전씨가 자동차에서 카폰으로 보안대와 경찰, 그리고 외교부 등에 연락하여 간신히 장소를 알아냈다.
임시정부의 옛 자리는 도심지인 추용노 37번지 또는 85번지라고 한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당시에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광복군사령부가 여기에 있었는데 어느 쪽이 임시정부이고 광복군사령부 인지는 모르겠다는 것이다. 또 그 당시 한국분들이 「한중우의찬관」을 경영했다고 하니 아마우리의 선열들이 호구지책으로 음식점을 냈는지 모를 일이다.
추용노는 도심지의 비스듬한 비탈로 올라가는 큰 길. 38번지는 「매원」이라는 식당으로 변해 있었다. 식당의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사람들이 가득 차있다. 여기에 우리선열들이 매일 왕래했으리라고 생각하니 감개무량하다. 몇 번이고 주위를 살펴본다. 85번지에는 중경화경상업공사라는 10층짜리 백화점이 들어서 있다.
내가 국내에서 듣기에는 우리 임시정부 건물이 아직 있다고 한 것 같은데 여기 와보니 그렇지 않아서 손씨와 전씨의 안내를 완전히 믿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부탁하지도 않은 광복군사령부와 「한중우의찬관」에 대해 이 분들이 먼저 말하는 것을 보면 이분들의 안내가 거의 틀림이 없는 것도 같았다. 나중에 서울에 돌아와서 전 고대총장 김준엽 선생한테 임정자리를 물어보니 당시 임정은 칠성출의 연화지라는데 있었고 지금도 그 건물이 남아있으며 추용노의「매원」자리에는 광복군사령부가 있었다고 한다. 서울을 떠나기 전에 그 장소를 미리 알아놓지 않은 것을 매우 후회했다. 그러나 광복군자리는 가보았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광복군사령부 터>
우리는 앞으로 중국과 교섭해서 임정자리의 건물을 수리·보존하고 추용노에는 조그마한 비석 하나라도 세워야하지 않을까. 중국측에서도 이것을 환영하리라고 나는 확신한다. 이런 일을 소홀히 해서는 선열에게 너무나 면목이 없다. 일본인들은 별로 대단치도 않은 중 한사람이 아미산에 간 것을 기념하기위해 아미산에 정자와 시비를 세운 것을 보았다. 언젠가 내가 필리핀의 어느 지방을 여행했을 때가 생각난다. 길가에 한자로 「비도사」라고 쓰고 화살표를 한 표지가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절은 2차 대전당시 필리핀에서 전사한 일본인 장병과 전쟁이 끝난 뒤 그곳에서 처형된 본간청아(혼마 하레아키)중장의원 혼을 달래기 위해 일본정부가 필리핀정부와 교섭해서세운 절이라는 것이었다.
중국인의 견적보존도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철저하다. 이를테면 이번 여행도중에 장개석과 관련 있는 유적도 다섯 군데나 보았다.
손씨와 전씨는 우리를 「소천공원」으로 안내한다. 경치 좋은 한적한 공원인데 거기에2차 대전 때 장개석 총통의 관저가 있다. 조그마한 단층양옥이었다. 안내판이 있는데 읽어보니 미국대통령 루스벨트가 보내온 나무 한 그루가 심어져 있다고 한다. 또 황산(중국 5대명산 가운데 하나인 황산이 아니고 중경에 있는 조그마한 산)외에도 장총통의 옛 집이 있다. 지금은 많이 퇴락한 큰 건물인데 올라가는 사람도 없어서 그런지 길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사람소리가 나길래 들여다보니 몇 사람이 마작을 하고 있다. 일종의 요양소로 변해버린 것 같다. 송미령 여사가 기거하던 건물은 아래쪽에 있는 당당한 2층 양옥이다. 「송미령구거」라는 표지가 붙어있고 훌륭한 해서로 「송청」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문틈으로 속을 들여다보니 침대가 여러 개 놓여있다. 마찬가지로 휴양소인가 보다. 모두 제행무상을 일깨워주는 풍경들이었다.
졸작 칠절일수
방광복군구기
무한투주노만천
심륜근역사회천
단심유조피창자
추노유종누현연
(낱말의 뜻. 유주-중경의 옛이름. 근역-한국. 피창자-저 푸른 하늘. 시경에 나오는 말)
중경추용노의 광복군 옛터를 찾음
무한과 중경 길은 만리 천리라.
잃어버린 고국은 언제 독립되려나.
단심은 오직 하늘만이 아시렸다.
추용노 옛터에 눈물짓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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