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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관한한 소신 굽힐줄 몰라 일방해불구 7광구 개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6면

『69년 10월17일 3선 개헌 국민투표가 실시돼 찬성 65·1%, 반대 31·3%였지않습니까. 분위기를 새롭게 하기 위해 대폭적인 내각개편이 있었지요.
정일권 국무총리를 비롯한 전각료가 일괄사표를 냈고 상공장관이었던 나도 명예제대라는 홀가분한 심정으로 떠날 준비를 했습니다. 이후락 비서실장·김형욱 정보부장도 바꿔게 되었고요.
사표를 낸 20일 오후3시쯤인가 사무실에서 짐을 꾸리는데 갑자기 박대통령이 나를 찾는다는 거예요. 집무실에 들어갔더니 박대통령은 팔짱을 낀채 동쪽 창가를 왔다갔다하고 있었어요. 내가 인사했더니 정색하면서 이러시는거예요. 「내일 비서실장으로 발령을 낼 터이니 그리알고 열심히 일해주시오」라고요.』

<개헌후 전격발탁>
박대통령은 자신의 오른팔을 임명하면서 50분간 국내외 정세를 자세히 설명했다고 한다.
김씨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나는 무의식중에 「각하, 저는 경제나 좀 알지 정치는 전혀 모릅니다. 비서실장만은 적임이 아닙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박대통령은 조금 긴장된 표정으로 이러셔요. 「경제야말로 국정의 기본이 아니오. 백성들이 배불리 먹고 등이 따뜻해야 정치가 안정되고 국방도 튼튼히 할수 있지 않소」 라고요. 박대통령은 이어 북한의 위협을 생생하게 설명하더군요.
김신조 일당습격, 푸에블로호 납치, 무장공비 침투등을 이야기하면서 「미국이 너무 미지근하다」는 불만도 감추질 않더라고요.
그러더니 결론 비슷하게 박대통령은 「나는 국방과 안보외교때문에 겅제를 들여다볼 여유가 없어요. 그러니 경제문제는 비서실장이 잘 챙겨주세요. 특히 수출을 늘러야하고 농촌을 잘 살게해야 합니다」라고 분부를 내리시더군요.』
김실장을 지켜보았던 이들은 『박대통령이 경제통을 제대로 골랐다』 는데 고개를 끄덕인다. 그의 이력을 들여다보면 자연히 수긍이 간다는 얘기다.
김씨 집안은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금융·경제가문이라고들 한다. 김씨는 태어날때부터 금융정책가로 자랄 운명이었다는 분석도 있다.
우선 부친 (김교철) 과 큰형(정호) 이 조흥은행장과 한일은행장을 역임했다.
24년 서울산인 그 자신도 강경상업·일본대분고상을 거쳐 조선은행(한국은행의 전신)에서 사회경력을 시작했고 부인 강순자여사도 그곳 직원이었다.

<이름난 금융가문>
그뿐이 아니다. 현재 1남(두경)·2남(승경)·3남 (준경)이 각각 한은통화관리과장·외환은외화자금부과장·KDI연구위원으로 재직하고 있고 사위 김중웅씨 (한국신용정보사장) 도 한은직원출신이다.
조카쪽도 마찬가지여서 큰형 정호씨의 1남 (원경) 이 조흥은행 비서실장이고 2남 (문경)은 외환은지점차장으로 있다.
김실장은 3공의 다른 스타들과 달리 박대통령과 별다른 인연의 끈이 없었다. 그가 박대통령을 처음 본 것은 62년 5월17일. 그는 52년 한은기획조사과장으로 1차 통화개혁을 입안했던 터라 혁명군부에 차출되어 이날 2차 통화개혁안을 보고하게 된다. 이후 62년 재무차관에서부터 상공차관 (64년)·재무장관 (66년)·상공장관 (67년)을 거치면서 대통령의 시선을 차곡차곡 저축해갔던 것이다. 정치는 몰라도 경제에 관한한 김실장은 거리낌없이 소신을 펼쳤던 것 같다. 그가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해냈던 일중 하나가 「7광구대륙붕개발」이었다. 정부각료를 지낸 K씨의 증언.
『70년 5월 우리 정부가 한일간 대한해협에 7광구대륙붕을 설정하고 석유탐사를 하겠다고 하자 일본이 발칵 뒤집혔어요.
일본의회와 언론에서는 「한국에 대한 경제협력을 중단하라」 고 목청을 높였고 일본정부는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겠다고 나섰지요.
일본내 친한인사들까지 「정말 경제협력이 중단될 수 있다」고 귀뜀한걸 보면 문제가 심각했었죠.
그래서 박대통령은 청와대에서 긴급회의를 열었어요. 정일권 총리·김학렬 부총리·최규하 외무·이낙선 상공장관과 청와대외교특보·주일대사, 그리고 김실장등이 참석했죠.

<일 경협중단 위협>
박대통령이 쭉 의견을 물어보는데 「7광구를 취소해야한다」는 의견이 대부분이었어요. 경제기획원에서는 일본의 경제압력을 걱정하면서 「자칫 잘못하면 2차 5개년계획이 흔들린다」 고 했고 외무부는 「국제사법재판소에 가면 이긴다는 보장이 없다」고 우려했죠.
주일대사는 일본의 현지 분위기를 전하면서 「일본측 주장에 상당한 이유가 있다」 는 의견이고요. 돌아가는 분위기로 보면 「괜히 국제정치를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7광구를 하자고 해서 골치 아프게 됐다」 는 거였죠. 상공장관때부터 대륙붕개발을 추진해온 김실장을 은근히 겨냥하는 눈길이었어요.』
K씨는 『회의가 거의 7광구 재고론쪽으로 흐르는데 김실장이 치고 나왔다』 며 증언을 계속했다.
『마지막으로 입을 연 김실장은 정면돌파론을 주장했어요. 김실장은 「7광구를 포기하면 독도를 잃어버리는 것보다 손해가 크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일본이 팔아주지 않는다고 해도 버텨야 한다. 백년대계를 위해 몇년간 어려움은 참아야 한다. 국제사법새판소에 가서도 이길수 있다」 고 하더군요.
이렇게해서 회의가 결론을 내리지 못하자 박대통령은 잔뜩 언짢은 표정으로 「다시 의논하기로 하자」며 회의를 끝냈어요.
김실장 그양반 성격이 얌전한것 같으면서도 치고 나갈 때는 무서운 면이 있어요. 나중에 들어보니 다음날 아침 일찍 박대통령이 집무실에 내려오자마자 집무실로 들어갔대요. 그러곤 전날 회의에서 했던 주장을 다시 간곡하게 이야기했다는거죠.
박대통령은 그 말을 듣더니 「나도 밤새도록 골똘히 생각했는데 실장말이 맞는것 같아요. 일본에서 아무리 압력을 넣어도 굽히지 않을거요. 회의는 다시 안할테니 각부처에 지시해 만반의 대비를 갖추도록해요」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각부처에서는 솔직히 「실장이 너무 튀는거 아니냐」 는 볼멘소리가 있기도 했지요.』
김실강의 정면돌파론은 성과를 거두었던 모양이다. 한국이 강하게 나가자 일본은 얼마후 열린 한일각료 회담에서 슬그머니 「공동개발」 이라는 타협안을 내놓았다.

<결국은 일도 굴복>
박대통령은 내심 일본의 힘을 신경썼으면서도 선심쓰듯 이카드를 받아들였다. 항상 손해보는듯한 대일본거래에서 모처럼 어깨를 펼수 있었던 경우였다.
「경제총참모장 김정렴」 의 영향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대목이 72년 8·3 사채동결조치다.
고리사채에 허덕이는 기업을 살려내기 위해 대통령이 비상대권을 발동해 무려 3천4백56억원에 달하는 기업사채를 묶은 것이니 이는 세계역사상 전무후무한 사건이었다.
청와대 경제비서실에 몸담았던 Q씨의 증언.
『70년대 초반엔 진짜 경제가 심각했습니다. 69년 13·8%에 달하던 경제성장률이 70년 7·6%, 71년 8·8%, 71년 5·7%로 떨어졌어요. 거기에다 부도기업이 속출하고 있었죠.
71년 7월께인가 박대통령은 김용완 전경련회장을 불러 「기업이 심하게 고생하는데 어떻게 도우면 되겠느냐」 고 물었어요. 김회장은 「모든 기업이 불황속에서도 열심히 일하지만 고리사채에 수익을 모두 빼앗긴다. 사채에 대해 비상한 수단이 없으면 기업이 즐줄이 문을 닫을지 모른다」 고 했죠.
김회강이 떠나자마자 박대통령은 김실장을 불러 「김회장 건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고 물었죠. 김실장은 「내일 아침에 내생각을 보고하겠다」 고 하고 나왔대요. 그날밤을 꾜박 새우면서 김실장은 비상전략을 짜낸 거예요. 다음날 아침 대통령 눈앞에 놓여진 보고서가 바로 8·3조치였지요.』
이렇듯 70년대에 엮어진 굵직굵직한 경제매듭마다 김실장은 깊숙이 손을 담갔다. 그러니 『한국의 경제성장은 그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는 평가가 자연스러울 법도 하다.
반대편 궤도외에 있던 정치는 그러나 덜커덕덜커덕 흔들리면서 탈선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진동은 90년대에까지 남아 우리를 힘들게 하고 있다. 『김실장은 정치열차의 조종간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는 주장이 있지만 과연 그것이 당연한 것이었는지는 또 다른 문제일 것이다.

<김 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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