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 몰락… 「이념 패배」간주|민중해방·혁명전략모색 오류… 진보학계선 반론 꺼려|"민중사학은 시대조류에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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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사회주의의 몰락이라는 세기적 변화가 학계에서는 보수학계의 진보학계에 대한 맹비판의 공세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오랜 침묵을 깨뜨린 보수학계의 비판물결을 사회주의권의 몰락과 같은 맥락으로 설명할수 있는 것은 학계를 가르고 있는 미묘한 이데올로기적 성격때문이다.
국내 진보학계는 대부분 80년대를 통해 급성장하면서 사회주의적 가치와 방법론을 상당히 차용, 현실비판의 도구로 사용해뫘왔. 따라서 최근 사회주의권의 몰락은 진보학계가 의지해온 이데올로기의 현실적 구현체가 사라진 셈이다.
이같은 변화가 진보학계의 학문적 성과를 전면부인하는 성급한 결론이 될수는 없지만 상당한 이데올로기적 혼란을 초래한 것은 사실이다. 보수학계는 현실세계의 명백한 변화를 움직일수 없는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의 패배로 간주하고 이같은 이데올로기적 배경을 지녀온 진보학계를 맹비판하고 나선 것이다.
적잖은 파문을 예고하는 역사학계의 최근 비판은 한림대:부설 한림과학원에서 펴낸 공동연구성과인 『현대한국사학과 사관』(일조각간)이다.
이 책은 한림과학원이 「지금까지 선뜻 다루지 못했던 사관을 본격 논의해보자」며 5명의 중견사학자들로 하여금 공동연구하게한 결과물이다. 역사학의 이데올로기인 사관을 다룬 이책의 핵심은 진보학계의 「민중사학」을 비판한 이기동교수(동국대)의 글이다.
이교수는 「민중사학론」이란 글에서 『민중사학은 지향하는 목표에 있어서 기성역사학계의 자유민주주의 체제옹호와 크게 배치된다』며 비판의 불가피성을 강조한다.
이교수는 80년대에 등장한 민중사학에 대해 『역사속에서 민중의 정서나 생활상을 탐구하는 민중사관의 본뜻과 다르다』며, 오히려 『그들의 연구는 현재 우리사회에 적용가능한 민중해방·민중혁명전략을 모색하는 작업』이라고 규정한다. 이는 곧『세계적 신조류(사회주의권 몰락)를 철저히 외면하는 한국판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으로 비판된다.
이교수는 글속에서 강만길(고려대)·정창렬(한양대)·안병직(서울대)씨등 유명교수와 「한국역사연구회」「구로역사연구소」등 진보적 연구단체를 비판대상으로 명시했다.
같은 책에서 공동연구 책임자인 이기백교수(한림대)도 「유물사관적 한국사관」이란 글에서 『유물사관만이 유일한 과학적 방법이란 배타적 태도는 잘못』이라며 『그럼에도 이에 집착하는 것은 학문외적인 문제때문』이라고 배척한다.
이 책의 무게를 더하는 것은 연구과정에서 거하순·우명직등 저명 역사학자들과 공동토론을 거쳐 수정·정리돼 나왔다는 점이다.
진보학계에 대한 또다른 비판은 원로사회학자인 황성모 전정신문화연구원교수의 현대사연구비판이다. 황교수는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발간 서평전문무크 『서평문화』 최근호에서 한국역사연구회의 현대사연구시리즈 『한국현대사 I·Ⅱ를 「수정주의사관의 오류」라고 비판한다.
황교수는 『이 책은 「미군은 점령군이고 소련군은 해방군」이라는 호악의 논리, 다시말해 이데올로기적 폭로와 음폐라는 양날의 칼을 사용하는 이중기준을 지니고 있다』고 비판한다. 나아가 『이책은 90년이후 공산권 내부변혁에서 생긴 「허무주의를 극복하려는 노력」이라며 시대의 변화를 외면하는 수정주의는 시대지체적 시각』이라고 꼬집는다.
한편 이같은 비판공세에 대해 진보학계는 재반론을 꺼리고 있다.
대부분 소장학자인 진보적연구자들은 선배교수격인 보수학자들과 논쟁을 벌일 경우 나타날 현실적 불이익을 우려한다. 또 유익한 토론이 되기보다 인신공격으로 흐르기 쉬운 학계의 바람직하지 못한 풍토도 논쟁을 가로막는 이유다.
진보적 역사학계의 중진인 강만길교수는 『비판이 부정확한 경우가 많다. 하지만 논쟁이 역사학에 한정되지 않고 정치·사상적 매도로 흐를 위험이 있기 때문에 성급한 반론을 내세우기 힘들다』며 토론문화의 미성숙을 지적한다. <오병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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