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우유전쟁] 6. 소의 젓은 모두 같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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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1988년 2월 나는 일본에서 열린 국제유업심포지엄에 연사로 초청받았다. 내게 주어진 주제는 '한국에서의 저온살균우유 개발'이었다. 나는 심포지엄 둘째날 오후 주제발표에 나섰다. 점심 직후의 나른한 시간임에도 회의장에는 오전보다 더 많은 사람이 앉아있었다. 한국에서 저온살균우유가 생산된 데 대한 일본 유업계의 충격과 관심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먼저 영상자료를 통해 설명했다. 그것은 지난 수년간 성진목장을 중심으로 펼쳐졌던 횡성낙우회의 '좋은 우유 만들기' 운동에 대한 사진과 각종 실험.통계자료였다. 운동을 시작하기 전의 목장 모습을 보여주고, 그리고 여기서 생산된 우유의 체세포 수가 ml당 1백만마리에 이르렀음을 설명했다. 이후 수년간의 노력 끝에 우유의 체세포 수를 ml당 평균 2만마리로 크게 줄였으며, 특히 1등급 원유의 경우 1만마리 이하를 기록했음을 보여줬다.

나는 "파스퇴르가 개발한 저온살균처리법을 이용해 생산한 우유는 공장에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목장에서 만드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나는 "우유의 흰 색깔 속에는 우주가 담겨 있다. 즉 생명이 숨쉬고 있다. 생명이 있는 우유를 만들겠다는 것은 단순한 유가공업의 문제가 아니라 문화의 문제이다. 파스퇴르우유가 성공하면 한국 식품산업은 한 세기를 뛰어넘어 새로운 발전 궤도에 진입할 것"이라는 말로 발표를 마무리했다. 우레 같은 박수가 터져나왔다. 회의가 끝나고서도 일본.유럽.미국 등에서 온 사람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나는 자신 있게 답변했다.

나는 한껏 들뜬 기분으로 김포공항에 내렸다. 뜻밖에 회사의 한 임원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나는 외국 여행을 떠나는 사장을 위해 회사 간부가 공항에 나오는 일만큼 꼴불견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나를 환영하려고 나온 게 아니었다.

"사장님, 우린 이제 죽었습니다."

그는 정말 다 죽어 가는 표정이었다.

"죽다니. 왜."

"이걸 보십시오. 정부가 우리를 공격하는 데 앞장을 섰습니다. 버틸 방법이 없습니다."

그는 한 장의 종이를 내보였다. 전단이었다. 압구정동을 비롯한 서울 강남 일대 아파트촌에 이런 전단이 뿌려졌다는 것이었다. '우유의 음용자 여러분께'로 시작하는 전단의 내용은 '기존 우유와 파스퇴르우유는 질적으로 아무런 차이가 없다. 다만 비싼 물건이 좋은 상품인양 소비자 여러분의 심리적 작용을 이용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었다. 덧붙여 '상세한 문의는 보건사회부 ○○과로 문의 바란다'며 전화번호까지 적어놓았다. 나는 당장 전화했다.

"파스퇴르우유와 기존 우유가 질적으로 차이가 없다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법은 일정한 기준 하에 우유 제조를 허가하고 있으니 법적으로 볼 때는 같습니다."

"법 규정은 식품으로서 갖춰야 할 최소한의 허가기준을 설정한 것뿐이지 모든 식품이 똑같은 품질로 만들어져야 한다고 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 까닭에 각 회사에서는 더욱 좋은 품질의 제품을 생산하려고 노력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듣지 못했다.

"그래도 파스퇴르우유와 기존 우유가 같다고 생각합니까"하고 물었다. "우유는 모두 소의 젖입니다. 같은 소의 젖으로 만들었는데 차이가 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기발한 대답이었다.

최명재 파스퇴르유업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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