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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국 예술단 "아, 옛날이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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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웅전 아나운서의 "마상원과 그 악단을 소개합니다"라는 멘트에 나왔던 그 관현악단을 기억하는지. 1980년대 최고 인기 프로그램이었던 '젊음의 행진'에서 스타 연예인 못지않게 인기를 끌었던 사람들은 '짝꿍들'이란 일종의 무용수들이었다.

가수 엄정화.박남정.장혜진 등은 모두 방송국 합창단에서 갈고 닦은 실력을 바탕으로 연예계로 진출한 케이스. 이처럼 한때 쇼 오락 프로그램의 꽃으로 활약하던 관현악단.무용단.합창단 등 예술단의 모습을 요즘 TV에선 좀체 찾아 보기 어렵다. 그들은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인가.

◇화려한 날은 가고=MBC에서 예술단이 출연하는 프로그램은 트로트 음악을 주로 방영하는 '가요 콘서트' 단 한 개뿐이다. 지난달 29일 MBC프로덕션 지하 연습실엔 이 프로그램에 대비한 관현악단과 합창단의 합동 연습이 진행됐다. 인원은 30여명 정도. 웅장한 팝스 오케스트라와는 거리가 먼 단촐한 모습이었다. 건너편 무용단 연습실에서도 단원은 고작 10명이었다. 80년대 후반 전체 예술단 인원이 2백50명을 웃돌 때와 비교하면 5분의 1도 안되는 규모다.

86년 합창단에 들어왔던 김국경씨는 "2백대 1이 넘는 경쟁률을 뚫고 공개 테스트를 통해 입단할 때는 주위에서 무척 부러워했다. 전속단원이면 월급도 대기업 직원보다도 좋았다. 한창 바쁠 때는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와 라디오 공개방송 등 하루에 네다섯개 프로그램을 한꺼번에 뛰느라 정신 없었다"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열린 음악회'가 있는 KBS는 사정이 좋은 편. 그러나 SBS는 아예 합창단과 무용단은 없앤 채 관현악단 15명만이 '가요쇼'에 출연하는 것으로 간신히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그래도 이들의 열정은 누구보다도 강렬했다.

이날 MBC관현악단과 합창단 연습에서도 이들이 만들어내는 사운드는 클래식과 팝 음악을 넘나드는 자유로움이 넘쳐났다. 피아노를 치고 있는 전윤호씨는 "방송물 먹은지 20년이 다 됐다. '딴따라'에도 격조가 있다고 자부한다"고 말했다.

◇립싱크 가수가 판치니=98년 IMF사태로 인한 방송국 구조조정의 여파가 예술단에 가장 큰 타격을 입히긴 했지만 근본적으로 예술단의 규모가 축소된 이유는 90년대 이후 방송 환경이 달라진 탓이다. 우선 이들이 나설 무대가 좁아졌다. 과거 '쇼쇼쇼' '쇼2000' 등 쇼 위주의 방송 포맷이 버라이어티 형식으로 탈바꿈하면서 대중음악만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프로그램은 방송사별로 한 두개로 감축된 탓이 크다.

음악 프로그램에서도 직접 관현악단에 의한 음악을 사용하기 보단 MR(music recorded)이나 AR(all recorded) 등 녹음된 반주 음악을 트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한 댄스음악 가수인 경우엔 자체 백댄서를 고용해 이들과 무대에 서니 무용단이 나설 자리는 그만큼 없어지게 된 것.

SBS관현악단의 김정택 단장은 "인간미가 없는 음악만을 틀어대는 환경이 씁쓸하지만 어쩔 수 없는 대세지 않은가. 이를 탓하기보단 오히려 관현악단과 함께 노래를 부르는 것이 영광스럽고, 또한 반주 음악보다 훨씬 더 음악 분위기가 좋다는 느낌이 들도록 경쟁력을 키우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래도 우린 이 길을 간다=예술단은 현재 방송국 정식직원이 아닌 계약직이다. 불안정한 신분일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열악하다. 15년 이상 고참의 경우에도 교통비조로 받는 기본급 70만원과 출연료 등을 합쳐 한달 급여가 1백만원을 간신히 웃돌 정도다.

당연히 방송 외적인 일에 눈이 돌아갈 수 밖에 없다. 예술단 관계자는 "합창단의 경우 가수의 음반 작업시 코러스 등에 주력한다. 무용단은 문화센터 강사 등을 많이 하는데 이럴 경우 방송국 예술단이란 명함이 조금 도움이 되곤 한다"고 전했다.

이런 악조건에서도 이들이 이곳을 지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용단 10년차 베테랑인 신상희씨는 "돈 보곤 절대 이 일 못한다. 우린 조미료 같은 존재다. 눈에 확 띄진 않지만 우리가 있어야 방송도 제 맛을 낸다"고 말한다.

합창단의 김국경씨는 "가수 제의도 몇번 받았지만 막상 합창의 화음을 한번 맛보면 다른 것이 모두 시시하다"고 말했다. 69년 MBC 개국과 함께 관현악단에 들어왔던 바이올리니스트 김동석(69)씨의 말은 꼽씹을 만하다. "처음 방송국에 간다고 했더니 같이 클래식 전공했던 친구들은 '미쳤냐 딴따라하게'라는 반응이었다. 막상 이 바닥에선 어느 수준을 갖춘 음악을 고집하니 금세 '예술하는 거냐'는 비아냥이 들렸다. 그래도 지금 전세계적인 음악의 가장 큰 흐름은 순수예술과 대중예술을 합친 크로스 오버다. 우리라도 이 자리에 있어야 둘의 가교 역할을 하지 않겠는가."

글=최민우, 사진=최승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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