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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포로 중사의 '분단된 유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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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포로 이규만 이등중사의 맏딸 이연순(右)씨가 9일 대전 현충원에서 아버지의 묘비를 딸과 함께 쓰다듬으며 슬픔에 잠겨 있다. 아래는 이연순씨의 중학교(우리의 고등학교) 시절 김일성의 생일날 선물을 받고 찍은 사진이다. 가족 가운데 세 명은 죽었으며 두 명은 행방을 찾을 수 없다.

"안 모셔 왔으면 이런 비극은 없었을 텐데, 오히려 아버지께 죄를 진 것 같습니다."

설을 앞둔 9일 대전 국립현충원. 국군포로 이규만(부사관급.1931년생) 이등중사의 묘비 앞에서 맏딸 이연순(45.새터민)씨는 울먹였다. 유해의 상반신은 북, 하반신은 남으로 나뉜 채 3년째 지하에 누워 있는 아버지 생각에 마음이 찢어지기 때문이다.

군번 8812170, 수도사단 1연대 2대대 7중대 이 중사의 비극적 삶을 딸 이씨는 이렇게 전한다.

전쟁 발발 직후 청년 이규만은 낙동강 전선에 배치됐다. 어느 날 엄청난 폭격 때문에 정신없이 몸을 피했다. 부대가 완전히 해체돼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없었던 그는 일단 고향인 충남 옥천군 군서면 동평리 집으로 가서 숨었다. 사흘 뒤 그는 부대를 찾아 집을 나섰다가 인민군에 포로로 잡혔다.

그리고 함경북도 끝 학포 탄광으로 끌려 갔다. 막장에서 석탄과 씨름하던 어느 날 스피커가 종전을 알렸다. 모두 기쁨에 들떴다. 그러다 돌연 "가면 다 죽으니 못 돌려 보낸다"는 방송이 나와 격분한 국군 포로들은 시위를 했다. 인민군은 총으로 진압했다. 일부 탈출자를 제외하면 모두 사살됐다. 이 중사가 생전에 간간이 말해준 내용이다.

어쩔 수 없이 광산 발파공이 된 이 중사는 결혼을 했고 서서히 북한 주민이 돼 갔다. 65년 폭발 사고로 얼굴 뼈가 함몰되고 오른쪽 대퇴부를 크게 다친 그는 벌목공이 됐다. 세월은 흘러 나이 40대 초반 때 그는 숯장이로 좌천됐다. 회령 동쪽 100리, 까치봉 기슭의 집이 6채뿐인 산골에서 외롭게 숯을 만들었다. 딸 이씨는 "숯만 보면 가슴이 쓰려 온다"고 말했다.

이 중사는 열심히 일했지만 진급이나 포상은 어림도 없었다. 가족도 감시당하고, 툭하면 사상 비판을 받고, 대학 진학도 못하고, 괜찮은 직업을 구할 수도 없었다. 전기도 없는 곳에서 최하층 노동자로 평생 일했던 이 중사는 2000년 4월 병으로 회령에서 사망했다. 그는 맏딸 이씨의 무릎에 기대 숨을 거두며 "언젠가 고향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씨는 2004년 3월 단신 탈북, 7월 국내로 들어왔다. 한국 여권을 얻은 그는 유해를 고향으로 모시기로 결심했다. 회령 친구에게 연락, 유해를 중국으로 반입했다. 옌지(延吉) 인근 산속에서 이씨는 눈물을 뿌리며 랩으로 아버지의 유골을 쌌다. 그런데 유해 상자가 룽징(龍井) 인근에서 중국 공안의 단속에 걸렸다. 사전에 유해를 가져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국방부와 외교부는 막상 사고가 나자 모두 발뺌했다. 이씨는 "지금도 정부가 원망스럽다"고 했다. 북한 보위부도 어떻게 알았는지 탈북을 위해 유해와 함께 나왔던 어머니와 남동생.여동생을 모두 끌고 갔다.

유골이 중국 공안에 압수되기 직전 이씨의 하반신 부위인 엉덩이.다리뼈 등을 몰래 챙겼다. 2004년 10월 이 중사의 유해는 51년 만에 조국의 품에 안겼다. 53년 9월 회령에서 전사한 것으로 기록돼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이미 위패가 모셔져 있었기 때문에 이 중사의 유골은 2개월 만에 신속히 대전 현충원에 안장될 수 있었다.

이씨는 그러나 기쁨보다 슬픔이 더 컸다. 아버지의 상반신 유해가 북으로 보내진 것은 확인했지만 지금 어디 있는지 모르고, 두고 왔던 두 딸은 탈북에 성공했지만 어머니와 남동생 모두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했기 때문이다. 여동생은 이 일로 이혼해 행방불명됐고 유해를 건네줬던 친구는 10년 징역형을 받았다. 이 중사의 가족은 풍비박산이 난 것이다.

이씨는 "북으로 넘겨진 아버지의 유해가 어디에 있는지라도 알게 정부가 나서 줬으면 좋겠다"며 "지금도 내가 살던 곳과 주변 마을에서 고생하고 있는 국군 포로 어른과 그 가족들이 눈에 선하다"고 말했다. 이날 기자와 함께 대전 국립현충원을 찾은 이연순씨는 아버지 생각에 눈물을 흘렸다.

대전=글.사진 안성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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