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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07) 경성야화(42) 「충무공 산소 경매」사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나는 당시 중국문학과 조선문학강의시간에 교실이 텅 비눈 것이 안되어서 2학년이던 김태준과 의논하고 둘이서 이 시간에 출석하기로 하였다. 김태준은 지난해에 이 과목을 청강했던터라 가끔 들어왔지만 나는 의무적으로 꼭꼭 출석하였다. 정선생의 이 강의는 내게 퍽 유익하였다.
고려시대의 이규보로부터 시작해서 조선시대의 역대 명시를 프린트로 책을 만들어 교재로 썼는데 줄줄 외면서 시의 맛을 가르쳐주는 그 강의는 참으로 훌륭하였다. 머리를 박박 깎고 안경을 쓰고 명주 두루마기 옷고름에 작은 수건을 달아 이 수건으로 콧물을 닦으시면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어려운 시를 해석하고 감상하시는데 혼자서 듣기가 너무나 아까운 명강의중의 명강의였다.
호가 무정인 정선생은 이밖에도 두보의 시가 좋다고 탄성을 발하시면서 우리나라 시를 제쳐놓고 두보의 시를 열심히 강의하셨다. 내가 한시에 흥미를 느끼고, 특히 두보의 시에 재미를 붙여 지금도 틈만 있으면 사시를 읽는 것은 그때 우리나라의 대시인 무정선생한테서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이다. 무정선생은 시가 무엇이라는 것을 내게 일깨워주신 잊지 못할 선생이었다.
193l년이 되어 많은 사건이 일어났다.
5월10일께 동아일보 사회면에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산소가 경매된다는 보도가 크게 났었다.
뒤이어 위당 정인보가 그 신문 1면에다 「이충무공 묘소 경매문제」라는 제목으로 피끓는 글을 썼고 동아일보는 사설로 「민족적 수치」라고 충무공 산소 하나 못지키는 우리민족의 딱한 형편을 통탄하였다. 이렇게 불을 질러놓자 드디어 민족의 의분이 불붙기 시작해서 경향각지에서 충무공 산소를 지키자는 운동이 크게 일어났다. 서울에서는 조만식·윤치호·안재홍등이 유적보존회를 조직해 전국적으로 민족적 위인들의 산소를 비롯한 유적을 보호하자는 운동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 얼의 근본인즉, 이충무공의 산소가 있는 충남 아산군 사정리의 묘소와 위토 60두낙을 충무공의 13대 손인 이종옥이 1919년에 서울 조흥은행에 나가 l천3백만원에 저당잡힌데서 비롯됐다. 그후 은행에 이자를 한푼도 안내고 십여년을 끌어왔고 은행에서는 이자까지 합해 2천4백만원이 되자 경매에 부치겠다고 통고해온 것이었다.
이 소식이 터지자 날마다 경향각지에서 이 토지를 도로 찾는데 쓰라고 의연금이 쏟아져 들어왔다.
의연금은 대부분이 1원, 50전하는 영세한 돈이었지만 노인들의 담배값으로부터 어린애들의 콧물묻은 돈까지 전 민족이 동원되어서 의연금을 냈으므로 동아일보는 날마다 한 두면이 이 의연금을 낸 사람의 이름으로 채워졌다. 이것이 쓰러져가는 민족의 애국심을 다시 일으키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얼마뒤에 많은 돈이 모여 묘소와 위토를 도로 찾고, 사당을 크게 짓고 영정을 새로 모시는 일을 동아일보가 맡아서 끝냈다. 이일로 우리들의 애국심이 크게 앙양되었다.
이렇게 충무공 산소문제로 모든 국민이 총동원되어 돈들을 내고 법석대는 7월의 어느날 일이었다.
나는 관수동에 사는 친척집 환갑잔치에서 돌아오는 길에 중국요리집 대관원 앞을 지나다가 이상한 광경을 보았다. 대관원앞길 좌우에는 지게꾼들이 지게를 버티어놓고 앉아있는 그때말로 「지게병문」이었다. 우리들은 그때 형사나 형사끄나풀들을 그들의 복색을 보아서 알고 있었다.
형사끄나풀임에 틀림없는 젊은 사람이 지게꾼 서넛을 모아놓고 『자아, 여기 막걸리 값 있어요』하면서 무슨 일을 해달라고 낮은 소리로 부탁하는 것이었다.
그랬더니 그중 한 지게꾼이 『우리들은 못해요. 대국사람(중국사람)들이 우리들한테 잘해주는데 어떻게 그 가게에 돌을 던지고 부숩니까』라며 거절하였다.
나는 이 소리만 듣고 그냥 지나쳤고 그 끄나풀도 대학생 복장을 한 나를 보고 움찔하였다.
그때 노동자들은 중국사람을 대국사람이라고 해서 존경하였다. 원세개 같은 중국장군이 서울에 와서 뽐내고 다닐 때에 보아온 사대주의 사상이 그냥 그대로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형사들이 노동자를 시켜서 중국상점을 습격하라고 시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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