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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2·13합의 이행 않고 시간끌며 미국 갖고 놀 수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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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월리엄 페리 전 미국 국방장관이 20일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북한 핵을 폐기시키려면 한·미 간에 강력하고 건전한 관계가 필수"라고 말하고 있다. [사진=신인섭 기자]

"2.13 북핵 합의는 한반도 비핵화라는 긴 여정의 첫걸음에 불과해요." 월리엄 페리(80) 전 미국 국방장관이 20일 북한 핵 문제에 대해 신중론을 피력했다. 스티븐 보즈워스 전 주한 미 대사, 미 국방부 차관보를 역임한 애시턴 카터 하버드대 교수, 김종훈 벨연구소 소장, 존 틸럴리 전 주한미군사령관과 함께 방한한 페리 전 장관은 이날 조선호텔에서 한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2.13 합의는 북한이 하기 나름"이라며 "한반도 비핵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강력한 한.미 동맹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페리 일행은 이명박.박근혜.정동영.손학규씨 등 한국의 대선 주자들을 만난 뒤 22일 개성공단을 방문할 예정이다. 다음은 일문일답.

만난 사람 = 김영희 대기자

"북한이 끝내 고농축 우라늄(HEU) 문제를 인정하지 않을 경우 6자회담을 깰 수 있는 악재(deal breaker)가 될 수도 있다."

윌리엄 페리 전 미국 국방장관이 20일 서울 웨스틴조선호텔에서 본지 김영희 대기자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6자회담의 새 돌파구가 된 '2.13 베이징 합의'를 일단 평가하면서도 북한이 합의 내용을 성실히 이행하지 않으면 그 의미는 사라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 밑에서 대북 문제를 총괄한 경험이 있는 그는 지난해 11월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의회를 장악하면서 더욱 주목받고 있다. 다음은 일문일답.

-2.13 합의를 평가한다면.

"이번 합의는 한반도 비핵화라는 긴 여정의 첫걸음에 불과하다. 6자회담 참가국들은 앞으로 60일간 실무협상을 통해 핵사찰 재개와 에너지 지원 등 구체적인 프로그램을 만들 것이다. 그러나 좀 더 두고 봐야 한다. 북한이 합의를 이행하지 않고 시간을 질질 끌면서 미국을 갖고 놀 수 있다."

-이번 합의는 1994년 체결된 북.미 제네바 합의와 큰 차이가 없다.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6년 동안 시간만 낭비한 것 아닌가.

"부시 행정부도 그런 점을 의식하고 6자회담에 임했다고 본다. 제네바 합의 당시와 비교할 때 부시 대통령의 입장이 더 어려웠을 것이다. 북한이 이미 핵실험을 강행했기 때문이다."

-이번 합의는 중유 제공을 포함한 대북 지원을 규정하고 있다. 혹시 미 의회가 대북 지원에 브레이크를 걸지 않을까.

"미 의회의 분위기가 과거와 다르다. 민주당이 장악한 의회는 2.13 합의를 지지할 공산이 크다. 의회는 60일간 진행될 5개 분야별 실무협상 결과에 관심이 많다. 이런 맥락에서 북한도 미 의회가 지지할 수 있게끔 실무협상에 성실한 자세를 보여야 한다."

-부시 대통령의 임기 안에 북.미 관계 정상화가 가능할까.

"(보스워스 전 대사) 북한이 하기 나름이다. 북한이 2.13 합의에 따라 핵을 폐기하고 성실한 자세를 보인다면 북.미 관계가 단계적으로 정상화될 수 있다. 그러나 핵문제 해결 없이 양국 관계가 개선되기는 힘들다."

-마카오의 방코델타아시아(BDA)에 묶인 북한 자금 2400만 달러는 어떻게 될 것 같은가.

"BDA 문제는 2.13 합의와 별도로 미국 국내법과 관련된 사안이다. BDA 문제는 이번에 해결된 게 아니다. 다만 BDA를 둘러싼 북.미 간의 긴장은 다소 풀렸다고 본다."

-북.미 양자 회담과 6자 회담 중 어떤 것이 효율적인 협상 틀이라고 생각하나.

"이번 6자회담은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한다.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가 6자회담과 별도로 미.북 양자 회동을 적절히 배합한 덕택이다."

-지난해 6월 워싱턴 포스트 기고를 통해 북한의 미사일 기지에 대한 선제 공격론을 제기했는데.

"북한 핵.미사일 문제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한 것이었다. 아침잠을 깨우는 일종의 모닝콜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북한뿐 아니라 미국.중국 모두에 대한 경고였다. 그러나 북한이 지난해 10월 핵실험을 강행한 것을 보면 평양이 내 모닝콜을 제대로 듣지 못한 것 같다."

-북한이 핵실험을 강행한 지금 (99년과 작성한 것과 유사한) '페리 보고서'를 다시 쓴다면.

"내가 작성한 페리 보고서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본다. 이번 2.13 합의도 페리 보고서에 따른 프로세스(과정)의 정신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내 보고서의 골자는 한반도 비핵화를 위해 미국이 분명한 대북 입장을 천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반도 평화를 달성하는 데 민주주의가 우선인가, 시장경제가 우선인가.

"시장경제가 먼저다. 그 다음이 민주주의다. 한국의 김대중 정부도 과거 이 방식을 추구했다. 미국의 부시 정권도 마찬가지 생각이다. 그러나 현 시점에서 시장경제와 민주주의 중 어느 쪽을 우선해야 하느냐는 문제는 북핵 문제를 푸는 데 별 도움이 안 된다. 북핵 문제는 이와 별도로 워낙 중차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모르겠지만 20~30년 내 북한에도 시장경제가 도입될 것이다."

-2002년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했던 부시 대통령이 북한과의 협상 테이블에 앉았다. 이는 부시의 외교노선이 도덕주의(이상주의)에서 현실주의로 선회한 것으로 볼 수 있는가.

"북한의 존재를 인정한 것은 현실주의적 측면으로 볼 수 있다. 2.13 합의 직후 부시 대통령의 기자회견 장면을 지켜봤는데 이번 합의를 상당히 긍정적으로 평가하더라."

-뉴욕 타임스는 이번 6자회담 협상 과정에서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과 크리스토퍼 힐 차관보가 대북 강경파인 딕 체니 부통령을 소외시킨 채 협상 내용을 결정했다고 16일 보도했다. 체니 부통령이 앞으로도 협상 과정에서 배제될 것으로 보는가.

(보스워스 전 대사)"기본적으로 북핵 문제는 체니 부통령의 문제가 아니라 부시 대통령이 풀어야 할 문제다. 이번 2.13 합의는 부시 대통령이 결정했다. 앞으로도 북핵 문제는 부시 대통령이 결정할 것이다."

◆윌리엄 페리(80)=수학 교수 출신으로 빌 클린턴 행정부에서 국방장관(1993~97)을 지냈다. 장관 재직 중인 94년 북핵 1차 위기 당시 영변 핵시설에 대한 폭격을 주장했다. 북한이 98년 8월 태평양을 향해 대포동 미사일을 발사하자 클린턴 대통령은 그해 11월 그를 대북정책조정관에 임명했다. 99년 5월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방북한 후 발표한 '페리 보고서'는 클린턴 정권의 대북 정책 지침서가 됐다. 공직 은퇴 후 모교인 스탠퍼드대로 돌아간 그는 지난해 6월 북한이 미사일 발사 움직임을 보이자 미사일 기지를 선제 공격해야 한다는 글을 워싱턴 포스트에 기고하기도 했다.

정리=최원기.강병철 기자<brent1@joongang.co.kr>
사진=신인섭 기자 <shini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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