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급봉투 들고 가는 귀향 길 오랜만에 설다운 설 보내요"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9면

동국제강의 신입사원 성희동씨가 16일 경북 포항역에서 대구행 귀향 열차에 올라타고 있다. 1년 넘는 각고 끝에 취업에 성공한 뒤 처음 맞는 설 연휴라 설레는 표정이 역력하다.

16일 오후 경북 포항역 플랫폼에서 선물을 한 보따리 들고 대구행 열차에 올라탄 성희동(29)씨. 열차가 출발하면서 그의 뇌리엔 수많은 순간이 만화경처럼 스쳐갔다. 일찍이 고교 시절 아버지를 여의면서 시작된 궁핍한 생활, 과일 도매상을 하던 홀어머니 얼굴의 늘어만 간 주름살, 대학 입학과 10년 만의 졸업장, 300만원으로 시작한 19개월간의 타국 생활, 1년의 각고 끝에 간신히 발을 디딘 직장 문턱 등등. "글쎄요, 이번 설은 왠지 떨리네요. 정말 오랜만에 설다운 설을 보낼 것 같아요."

1월 초 동국제강에 그룹 공채 1기로 입사한 성씨에게 이번 귀향길은 남다를 수밖에 없다. 월급봉투를 쥐고 설 쇠러 가는 그의 발걸음은 가볍기 그지없다. 근무지인 포항에서 어머니가 사는 고향 대구로 가는 길을 그는 "너무 아름답다"고 했다.

그가 동국제강에 둥지를 틀기까지의 과정은 역경의 연속이었다. 1년 동안 50번 넘는 도전 끝에 이룬 값진 성취였다. 성씨는 1997년 경북대 경제통상학부에 입학했다. 경제학을 전공해 금융회사에서 일하고 싶었다. 밝고 자신감 넘치는 성격이라 지난해 설 연휴 때 친척들을 만나 마지막 학기 중에 금융권 직장을 구하고 가을 졸업을 하겠다고 호언했다. 그러나 현실은 참담했다. 지난해 6월까지 서류전형의 관문조차 뚫지 못했다. 30군데 넘게 입사원서를 넣어 봤지만 단 한 통의 회신도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부끄럽기도 하고요. 이유가 뭘까 친구들과 소주잔 기울이며 따져 보기도 했죠."

930점대의 토익점수, 4.5 만점에 3.6의 학점이 무색한 건 아무래도 나이 탓인 듯싶었다. "나이 많은 게 무슨 죄라고…." 솔직히 억울한 심정이었다. 가세가 기운 상태에서 그나마 학비가 싼 국립대를 택했다. 학비는 스스로 해결해야 할 과제였다. 2학년까지는 마음 맞는 친구들과 음악 밴드를 결성해 푼돈을 모으기도 했다. 98년 말 입대해 병장 제대한 이후에도 아르바이트로 학비와 생활비를 해결했다. 학비가 잘 모이지 않으면 휴학을 해야 했다. 휴학과 복학을 반복했다.

없는 형편에 남들처럼 어학연수를 갈 수 없었다. 큰 마음 먹고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 300만원을 털어 영국 남부의 본모스로 유학을 떠났다. "편도 비행기표를 끊고 학비와 집세 등을 해결하니 손에 10만원이 남더군요. 도착 후 일주일 뒤부터 대학 내 청소용역업체에서 주당 10시간 정도 아르바이트를 했죠. 월 30만원 정도의 수입으로 근근이 생활했습니다. 오기가 생겼죠. 수입이 좋은 호텔 주방보조로 뛰었고, 19개월간 영국 생활에서 200만원을 저축했습니다." 그의 영어 실력은 원어민 못지않다는 주변의 평이다.

지난해 추석 연휴 기간에는 두문불출하며 집에서 입사 원서만 썼다. 어쩌다 눈을 붙이면 원서 쓰는 꿈을 꾸며 가위눌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나이를 따지는 금융권 대신 제조업을 하는 대기업에 원서를 넣었더니 몇 군데에서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10월부터 12월까지는 한 달에 다섯 차례꼴로 서울을 오갔다. 한 달에 들어가는 교통비와 숙박비가 50만원에 달했다.

천신만고 끝에 지금 직장의 최종 합격자 100명에 끼었다. '세계화와 지방화가 동시에 진행되는 현실 속에서 세방화(世方化)의 인재가 되겠다'는 등 자기소개서의 문구 곳곳에는 동국제강에서 일하고픈 그의 심정이 절절히 담겨 있었다. 그는 포항제강소의 물류 업무를 맡는 공정출하팀에 배치받았다.

성씨는 "경영혁신을 꾀하는 경영진에 제 다양한 경험, 그리고 문제.상황에 대한 대처능력을 보여 드린 게 좋은 점수를 딴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취업 예비생들에게 "자신의 현재 위치를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자신감을 잃지 않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심재우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