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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03) 경성야화(38) 신간회 창립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1927년은 신간회와 근우회가 창립되어 민족운동의 단일전선이 형성된 해였다.
항일독립운동을 일으킨지 10년이나 지났으므로 자칫하면 이 운동이 퇴색해갈 염려가 있었고 그 사이 좌익세력의 급성장으로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간의 제휴가 없이는 항일독립운동의 총역량을 집중적으로 발휘할 수 없게 되었다. 총독부는 이들 두 진영 사이에 이간을 획책, 독립운동이 위기에 처하게 되었으므로 자주독립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두 전선을 시급히 통합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이같은 좌우합작의 통일운동을 더욱 촉진시킨 것은 일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자치운동 때문이었다. 민족주의를 표방하는 박희도 일파의 조선연구회 측에서 「전조선공직자대회」를 개최하고 조선에 참정권과 의회설치를 요구하는등 건의서를 일본정부에 낸 일이 있었다.
이같은 움직임을 저지하기 위해 좌우 양파는 협의를 거듭한 끝에 마침내 신간회라는 통합단체를 탄생시켰다. 처음에는 그 명칭을 신한회로 하려다가 총독부가 이를 불허하자 신간회로 바꿨다.
1927년 2월15일 신간회는 종로 YMCA회관에서 창립총회를 열고 회장에 민족의 원로인 이상재를 추대하고 강령으로는 세가지 항목을 채택하였다.
▲우리는 정치적·경제적 각성을 촉진한다 ▲우리는 단결을 공고히 한다 ▲우리는 기회주의를 일절 부인한다.
이같은 강령은 대단히 추상적이고 모호하긴 했지만 그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와 동시에 여성단체들도 좌우통합으로 단일 투쟁단체인 근우회를 창립하고 3개월 후인 5월27일에 발회하였다. 회장은 유영준이었다.
이리하여 두 단체는 단시일 안에 국내는 물론 일본과 만주에까지 지회를 설치, 일제에 대한 비타협적인 과감한 투쟁을 전개해나갔다.
그런던 차에 신간회 회장이요 민족의 원로인 이상재가 그해(1927) 3월29일 별세하였다.
그당시 신간회의 진용으로는 회장 이상재를 비롯, 민족진영의 인사인 신석우·안재홍·조병옥·김병노·홍명희·권동진·이승복등이 있었고, 좌익에서는 박헌영·구연흠·임원근·권태석등 모두 쟁쟁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월남 이상재를 사회장으로 모시기로 결정하였다. 사회장이란 지금의 국장에 해당한다. 나라가 없던터라 국장이란 이름을 붙이지는 못하였지만 민족 전체가 뜻을 모아 민족의 최고지도자를 민족의 이름으로 장사지내자는 것이었다.
1922년 정월에 운양이 별세했을 때 그가 일찍이 구한말 외무대신까지 지냈고 3·1독립운동당시민족대표로 나서기를 주저하기는 했지만 그후 총독부에 독립승인 최고징을 내는 바람에 작위를 몰수당하는등 그 행적이 가상하다 하여 그를 사회장으로 예우하자는 의견도 일부에서 나왔지만 반대의견이 더 우세해 필경 실현되지 못한 일이 있었다. 그러던 것이 이번에는 좌우양쪽에서 아무런 반대없이 사회장으로 결정한 것이었다.
조선기독교청년회 총무, 조선교육회 회장, 조선일보 사장, 신간회 회장등의 직함으로 민족의 정신적 지주였으며 민족의 최고지도자였던 그에게 당연한 예우였다.
4월19일의 사회장 당일 전국에서 모여든 수만명의 민중이 그의 영구를 이끌고 서울장안의 대로를 행진하던 광경은 일찍이 보지 못했던 장관이었다. 영구는 기차로 그의 선영인 충남까지 모시게 되었는데 정거장마다 남녀노소 민중들이 나와 애도의 뜻을 표하는등 그 열성이대단하였다.
그는 1850년 출생, 구한말 고관을 역임했고 나라가 망한 뒤에는 항일구국의 대열 앞에 나서 애국청년과 함께 분투했으며 해학과 기지로 일본통치자를 우롱하여 민족불멸의 의기를 보여주었다. 진실로 그는 민족이 경앙하는 거인이었다.
겨울이면 중산모에 검은 털남바위를 받혀쓰고 흰두루마기에 흰버선·흰고무신을 신고 뒷짐을 진 채 나무지팡이를 질질 끌면서 천천히 청년회를 향하는 것이었다. 젊은 사람들은 그에게 허리를 굽혀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그는 일일이 답례를 하고, 때로는 젊은 사람과 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이렇게 이상재는 젊은 사람을 사랑하고 지도해나갔으며 조선의 장래를 그들에게 걸고 그들을 채찍질해나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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