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 '인간'으로 되살아난 '사막의 여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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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뒷좌석에 롬멜이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이미 죽어서, 의식을 잃은 채 주저앉아 흐느껴 우는 듯한 모습이었다. 가쁜 숨을 내쉬거나 신음하는 듯한 모습이 아닌, 그저 흐느껴 우는 듯한 모습이었다."

1944년 10월 14일 자살을 강요당한 에르빈 롬멜(1891~1944)이 청산가리를 먹고 숨이 끊어지는 순간을 묘사한 운전기사의 증언은 '사막의 여우'라 칭송받았던 그의 최후가 슬프고 참혹했음을 알려준다. 아돌프 히틀러가 광기로 몰아가던 제3제국의 체제를 받쳐주던 신화,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민족의 영웅이 되어 둘째로 높은 군인 지위에 올랐던 그였지만 삶의 끝판은 비극이었다.

독일 기록필름 제작자인 마우리체 필립 레미가 쓴 '롬멜'은 '롬멜 신화'의 진실과 거짓을 밝히는 치밀하고 꼼꼼한 전기이자 보고 문학이다. 롬멜이 남긴 편지와 일기, 명령 기록들과 메모를 비롯해 개인 사물과 수집품을 몇 년에 걸쳐 조사하고 1백50여명이 넘는 롬멜 주변 인물을 인터뷰한 레미는 이 정보를 역사학자들과 비교.분석하는 공동작업을 펼쳤다.

그는 "재판하기 이전에 먼저 올바른 전기를 재구성해야 한다"고 썼다. 원전을 기초로 진정한 롬멜의 모습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는 것, 즉 그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려는 시도가 이 책을 쓰는 이유라고 레미는 밝혔다.

롬멜은 생을 마감할 때까지 히틀러와의 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숙명에 얽매어 있으면서도 자신의 양심에 어긋나는 히틀러의 명령을 거부했다. 레미는 "이것이야말로 롬멜의 또 다른 진실"이라고 결론짓는다.

정재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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