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시설 불능화' 벌써 불능사태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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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북한과 미국이 6자회담 합의서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주요 합의사항에 대한 해석에서 이견을 드러내고 있다.

북한 관영 조선중앙통신은 13일 6자회담 결과 합의된 핵시설의 '불능화' 대신 '가동 임시 중지'라는 표현을 썼다. 중앙통신은 이날 회담 타결 소식을 전하면서 "각 측은 조선(북한)의 핵시설 가동 임시 중지와 관련해 중유 100만t에 해당한 경제, 에너지 지원을 제공하기로 하였다"고 전했다. 이는 이날 발표된 합의문 내용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합의문은 북한이 핵시설을 돌이킬 수 없이 못 쓰게 하는 '불능화'를 이행해야만 100만t의 에너지를 지원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북한이 1994년 체결된 북.미 제네바 합의를 파기하고 원자로를 재가동할 수 있었던 건 핵시설의 단순 '동결'만을 규정했던 합의의 맹점을 평양이 악용했다는 판단에서 내놓은 대안이 '불능화'다.

이번 보도가 북한 당국의 공식 입장이라고 단정하기에는 다소 이르다. 그러나 북한이 조만간 나올 것으로 보이는 외무성 공식 입장에서도 '가동 임시 중단' 같은 표현을 계속할 경우 6자회담은 또다시 삐걱댈 공산이 크다. 북한이 핵시설 불능화 조치에 이르기까지 취할 각종 조치마다 새로운 요구를 내세워 더 많은 보상을 챙기기 위해 이런 표현을 들고 나왔을 수 있다는 지적이다. 또 합의문에 불능화의 구체적인 종결시기가 명시되지 않은 것도 북.미 간에 논란의 불씨가 될 수 있다.

마카오의 방코델타아시아(BDA) 은행에 동결된 북한자금 해제문제와 북한의 모든 핵 프로그램의 완전한 신고문제 역시 북.미 간에 '동상이몽'이 계속되고 있다. 북한은 동결자금 2400만 달러 모두를 즉각 해제해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반면 미국은 합법으로 결론 난 자금만, 그것도 북한의 합의 이행 여부를 봐가며 풀어줄 수 있다는 입장이다.

마이클 그린 조지타운대 교수는 "3월 6자회담 재개에 즈음해 북.미 간 금융회담이 열리면 이런 이견 때문에 논쟁이 불가피할 것"이라며 "이 문제가 6자회담 진척을 늦추는 '과속방지턱'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북한의 모든 핵 프로그램 신고 문제 역시 북.미 갈등의 불씨가 될 소지가 있다. 미국은 북한이 이미 제조했거나 제조 중인 모든 핵무기.플루토늄 및 고농축우라늄(HEU) 프로그램까지 전부 공개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반면 북한은 그동안 우라늄 프로그램은 존재하지도 않았다고 주장해왔다.

한편 미국의 북한 테러지원국 해제에 대해 토머스 시퍼 주일 미국대사는 14일 "당분간 해제할 일은 없다"고 밝혔다. 그는 이날 도쿄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해제를 위한 프로세스를 시작하겠다고 했을 뿐"이라며 "북한의 동향을 검증하고 향후 더 이상 (북한의 테러지원이) 없다는 확증이 필요하다. 긴 여정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핵 프로그램 공개 과정이 시작되면서 북.미 간에는 우라늄 프로그램의 존재와 그 공개 범위를 둘러싸고 적잖은 마찰을 빚을 것으로 예상된다.

워싱턴=강찬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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