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33)명시와 충혼깃든 촉석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굽이쳐 흐르는 진주 남강이 있어 이나라의 역사는 더 푸르고 바위 벼랑에 우뚝솟은 촉석루(촉석루) 가 있어 천년시의 강물은 마르지 않고 흐른다. 산이 있고 물이 있는 곳, 시가 깃들이지 않은 곳이 없다하나 측석루에 오르는 이, 시를 짓지 않고는 돌아서지 못했으니 여기 높은 다락에 씌어진 시가 산이 되고 물이된 까닭을 어찌 헤아릴까보냐.
남강은 지리산에서 발원하여 흘러내려 와서 비봉산이 남쪽으로 앉은 진주시의 한복판을 휘돌아 감고 빠져나가 진양호를 이루는 낙동강의 지류다. 옛날에는 영강이라고 이름했는데 진주의 남쪽에 흐르는 강이라고 남강이라 고쳐 불리게 된다.
짝지은 오리들 물차며 날고
영산홍 푸른 유리에 거꾸로 비치누나
화공이 다 못 그린 천개 바위의 뜻을
찾아든 서생들은 시 한수씩 지었네.
『동국여지승람』에는 조선조의 선비 최성일이 남강을 이렇게 찬미했다고 적혀있다. 지리산에서 온 물이어서일까 푸른 유라같은 물빛에 드리운 영산홍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이 남강이 흐르다가 마침내 머무르는 곳이 있으니, 바로 측석루를 이고 앉은 바위 벼랑이다. 여기서 촉석강(촉석강)이란 이름을 얻기까지한다.
이인로는 일찍이 『파한집』에서 「진양의 강물과 산의 빼어난 경치가 영남에서 제일」이라고 서슴없이 밝혔고, 조선조에서 영의정을 지낸 이곳 사람 하윤은 『촉석정기』에 「굽어보면 긴강이 아래로 흐르고 여러 산봉우리가 둘러서 있다. 뽕나무와 대나무 사이로 초가가 보일듯말듯 하며 푸른 돌벼랑과 흰 모래밭이 맞닿아 있다」고 촉석루에서 내려다본 풍광을 그리고 있다.

<진주 한복판 위치>
촉석루, 이 다락은 진주시내한복판(본성동)에 서있어 남강과 더불어 진주의 상징으로 자랑하고 있지만 이 나라사람들의 가슴에 사는 고향과 같은 다락이고 더욱 시인들에게는 뿌리칠 수 없는 시심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고려 공민왕14년(1365)진주성을 축성하던 부사 김춘광이 짓기시작하여 안상헌이 완공하였다고 하는데 두 사람 모두 과거에 장원급제해 장원루라고 불렸다고 한다. 그러나 이 다락이 세워지기 이전에는 진주성(진양성, 또는 촉석성)의 남장대로 전쟁이 일어나면 주장이 이곳에서 군대를 지휘하던 곳이다.
세워진지 10년 남짓한 우왕5년(1379) 왜군의 침입으로 불에 탄 이후 임진왜란, 6·25전쟁을 거치면서 6백여년동안 소실되고 다시 일으켜 짓기를 여덟차례, 지금 서있는 것은 6·25동란 10년후인 1960년5월에 새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정면 5간, 측면 4간, 단층8작 나무기둥의 기와집으로 옛모습을 다시 찾은 것인데 중건기에 쓰인 「정사를 잡은이는 이 누대를 불태우지 않도록 하라」는 글귀가 촉석루의 마음을 달래주고 있다.
긴세월이 불멸의 누각을 다 다녀간 시인·묵객들의 수를 어찌 헤아릴 것인가.
퇴계 이황의 숙부인 송재 이우는 이곳에 목사로 와「3년동안 바람과 달을 맞아 시1천수를 지었다」고 이에 적고있으니 그 많은 시인들이 읊고간 시가 남강의 모래만큼이나 되는 것은 아닐는지. 오늘에 전하는 시만 해도 몇백수가기록으로 남겨져있다.

<김성일 시가 압권>
백문보, 정을보, 이장, 정이오, 이황, 서식, 김성일, 김구간, 정문부, 목대흠, 유호인, 정고용, 황현,정인보등 고려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큰 선비들이 모두 촉석루에 시를 바쳤다.
그 절장의 시편들 속에서도 임진왜란때 진주대첩을 이끈 문무경전의 의인 학봉 김성일 의「촉석루」가 압권이다.
촉석루에 세 장사가 모였네
한잔술에 웃으며 강물을 가리키네
강물은 도도히 흐르고 흐르네
저 물이 마르지 않듯이 나라사랑의 혼도 죽지 않을 것을.
(촉석루중삼장사 일배소지장강수 장강지수류도도 파부탁혜혼부사)·
삼장사시라고도 불리는 이시는 김성일 이 임진왜란때 초유사로 진주성에 와 조종도·곽재우와 함께 진주의 사수를 맹세하며 지은 시다. 진주 목사 이경이 달아난 것을 보고 왜군을 막지 못할 것을 예감한 조종도가 강물에 뛰어들어 함께 죽자고 했을때 「죽음은 두렵지 않으나 헛되이 죽을수 없다」고 달래며 쓴 시라고 전하고있다.
김성일 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년전인 선조22년(1589년) 일본통신사 부사로 일본에 다녀와서 「풍신수길의 눈이 쥐같고 큰일을 할 인물이 못된다」고 보고한다. 이런 오판이 임금과 나라에 불충이 되었다는 가책에 김성일 은 더욱 분발해 진주성을 지키는 용맹을 떨친 것이었으리라.
이장은 읊었다.
「강루에 서늘한 바람이 가득차고
대숲의 푸른 빛이 옷을 적시네
서리에 붉은 감이 더욱 무겁고
흰 고기떼 가을에 살이 찌겠구나」
백문보는 이렇게 시를 얻고있다.
「다락에 올라 놀던 때를 떠올리며
산과 물에 물어 시구를 찾네
난세를 평정한 어진이가 어찌 없을까보냐
술은 나를 흔들어 늙은 몸을 더 슬프게 하는구나」
허침(침)의 노래를 들어보자.
「10년토록 두루 떠돌다가
비로소 신선의 다락에 기대섰구나
술에 취해 내 머리가 흐린것가
세속을 벗고 높은데 올라시를 짓는 맑은 놀음에 빠진다」
논개사당의 「의기사기」를 쓴 다산 정약용의 시는 한결 뜨겁다.

<정약용 논개 찬양>
「옛 싸움터에 봄 바람은
풀과 나무에 돌아오고
황성에 밤비가 내리니
물안개 소용돌이치는구나
오늘 물속의 무덤엔
꽃다운 호하 잠들어 있겠지
촛불 밝히고 술잔을 기울여
삼경을 지나고 있네.」
여기에시 논개와 만나게된다.
촉석루아래 물가에 앉은 의암은 논개가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모곡재륙조)를 끌어안고 떨어진 바위다.
진주성이 왜군에 함락되자 경상병사 최경회, 창의사 김천일등은 촉석루에 모여 임종시를 읊고 남강에 몸을 던져 충성을 다 못바친 부끄러움을 씻는다.
남편 최경회의 죽음을 갚아주기 위해 논개는 마침 승전을 자축하는 술자리를 베풀기 위해 기생들을 불러모은다는 소식을 듣고 이름 얹혀 그자리에 참석, 적의 우두머리를 유인, 19살 꽃다운 나이로 의로운 죽음을 결행한 것이다.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 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교과서에서 배운 십영노의 『논개』는 나라가 바람앞의 등불같을때 한 여인이 바친 임사랑·나라사랑의 거룩한 뜻이 우리네 가슴에 흘러 넘친다.

<매년 여인들 제사>
촉석루 경내엔 논개의 초상이 걸린 「논개사당」이 있어라 마다 여인들이 제사를 받들고 있고 임진왜란의 진주대첩(1593)때 순절한 7만호국영령을 기리기 위해 「진주성왕신대첩 계기순의단」 이 1987년12월에 건립, 남강을 굽어보며 그날의 아픔을 새기고 있다.
「뒷날 이 다락에 오르는 이는 물가에 풀이 돋아나는 것을 보며, 하늘이 먹고 입을 것을주는 것을 생각할지며, 털끝만큼이라도 어질지 못하여 백성을 괴롭히지 않을 것을 생각할지며…」.
하륜의 글을 다시 어루만지며 촉석루 벼랑길을 내려선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