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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Bs] 명절이면 깊어지는 '취업 스트레스' 부딪혀서 벗어나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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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3면

3년째 일자리를 찾고 있는 이모(28)씨는 설이 다가오는 게 두렵다. 매해 명절마다 부모님 때문에 부산 큰댁에 가기는 하지만 제사만 끝나면 먼저 일어선다. 그는 "이번 설에도 절만 하고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요즘 뭐하느냐"고 물어보는 친척들에게 할 말이 없기 때문이라는 게 이유였다. 그러나 조금 더 얘기를 해 보니 그는 심한 대인기피증이 있음을 고백했다. 구직기간이 길어지면서 생긴 증상이다. 친구들이 하나 둘 취직을 하면서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생각에 사람 만나는 게 싫다고 했다. 그래서 평소에는 주로 혼자 방 안에 틀어박혀 취업 준비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증상은 지난가을부터 심해졌다. 꼭 입사하고 싶었던 회사의 최종 면접에서 떨어지고 난 뒤 4개월 동안 술만 마셨다. 요즘은 뒷골이 당기듯 아프고 가끔 헛구역질도 난다.

구직자들 사이에 취업 스트레스로 인해 실제로 정신.육체적 질병이 생기는 '구직병(求職病)'이 심각한 것으로 나타났다. 청년실업이 늘고 구직기간이 길어지면서 생긴 현상이다.

중앙일보가 취업포털 파인드잡(www.findjob.co.kr)과 함께 구직자 1721명을 대상으로 구직병 조사를 벌인 결과 구직자 열 명 중 여덟 명(81.1%)이 "취업 스트레스로 정신.육체적 질병을 앓은 적이 있다"고 답했다. 전체 응답자 중 절반 이상이 우울증(56%)과 불면증(54%)을 경험했다. 취업 스트레스 때문에 병원 치료를 받았다는 구직자도 전체 응답자의 24%에 달했다.

구직자 유모(28.여)씨는 2주 전 소화가 안 되고 잠이 오지 않아 내과를 찾았다. 그는 이런 증상이 우울증 때문이라는 것을 알지만 일단은 신체적 증상이 괴로워 먼저 해결하려고 내과에 갔다는 것이다. "누가 한마디만 해도 눈물이 나요. 누굴 만나는 게 싫어요. 하루 종일 컴퓨터에만 매달려 있어요. 화장실에 가는 것도 불안해요." 그는 취업 포털 사이트를 잠시라도 안 보면 안절부절못할 지경이라고 했다.

문제는 구직자 상당수가 자기가 아프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어떻게 해야 몸 상태와 기분이 나아질지 잘 모른다는 것이다. 전체 응답자의 36%가 취업 스트레스로 생긴 정신.육체적 질병에 대해 '그냥 내버려 둔다'고 답했다.

정신과 의사 등 전문가들은 구직병을 앓고 있는 이들에게 "의식적으로라도 새로운 사람들을 계속 만나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래야 긍정적이 되고 자신감도 생긴다는 것이다.

김모(30.여)씨가 바로 이렇게 구직병을 극복한 사례다. 그는 서울에 있는 모 사립대 국문과를 나와 홍보대행사를 다니다 회사가 어려워지는 바람에 2003년 가을 일자리를 잃었다. 비슷한 수준의 회사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 2년이나 이력서만 쓰다 보니 우울증세가 나타났다. 가족들과 말도 안 하고 방 안에 틀어박혀 지냈다. 아무 일 없이 몇 시간씩 울기도 하고, 눈을 뜨기 싫어 커튼을 친 채 사흘 내리 잠만 자기도 했다. 죽고 싶어서 돌덩이를 넣은 배낭을 메고 한강 주변을 서성거렸다.

그가 다시 세상으로 나온 건 2005년 11월, 사무보조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면서다. 시급 4000원의 단기 아르바이트였지만 일이 생긴 것만으로 그는 딴사람이 됐다. 규칙적으로 출퇴근을 하고, 사람들과 대화를 하면서 성격이 밝아졌다. 회사를 고르는 눈도 낮췄다. 우선 무슨 일이라도 시작해야 병이 낫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지난해 4월 그는 기업단체교육을 기획하는 회사에 취직했다. 채용 공고에 나온 나이 제한에도 걸렸고, 경력 요건도 맞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무작정 전화를 걸어 "너무 다니고 싶다"고 했다. 전화를 받았던 사장은 열성에 감동했다며 입사를 허락했다. 그의 연봉은 1500만원 수준. 처음 생각했던 조건의 직장은 아니지만 70%는 만족한단다. "그 힘들었던 시간에 마침표를 찍게 해 준 직장이잖아요. 처음 출근하던 날을 생각하면 지금도 너무 고마워요."

한양대 구리병원의 박용천(정신과) 교수는 "규칙적으로 하는 일 없이 혼자만 있으면 불안한 마음이 더 커진다"며 "자원봉사라도 시작해 몸을 움직이는 게 불안감.우울증을 떨쳐내는 좋은 방법"이라고 조언했다.

임미진 기자

어른들 만나면
고개 들고 이야기하라
"곧 될 겁니다"
당당한 백수가 멋있다

구직병을 앓고 있는 이들은 한결같이 "마음을 털어놓을 데가 없어 힘들다"고 말했다. 설문조사 결과 '힘들 때 친구.가족 등 가까운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한다'고 답한 사람은 열 명 중 세 명 정도뿐이었다(31.3%). 이들은 "취직한 친구들에게서 소외감을 느끼고, 가족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미안하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친척들이 모이는 설날, 친척들이 건네는 위로가 오히려 구직자들에게는 힘든 일이 될 수 있다.

전문가들은 구직자에게 '그때 지원한 ○○회사 어떻게 됐어?' '요즘은 어떤 회사 서류 넣고 있어?' 하는 식으로 자세히 물어보지 말라고 충고한다. 뭔가 도와주고 싶더라도 구직자들이 먼저 도움을 요청할 때까지 기다리는 게 낫다. 취업포털 파인드잡의 정재윤 본부장은 "섣불리 위로.격려를 건네려 하는 것보다 윷놀이 등으로 잠시라도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게 낫다"고 충고한다.

그러나 지나치게 불규칙한 생활을 하거나 사람들을 피하려고 하거나 무기력증에 빠진 경우라면 단기 아르바이트 등을 권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적은 돈이라도 벌면서 자신감을 찾을 수 있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기분 전환에 도움이 된다. 우울증에 걸린 구직자들은 자신을 계속 비하하려 든다. 이럴 때는 사소한 일에서라도 그 사람의 장점을 계속 일깨우며 자신감을 심어주는 게 좋다.

구직자들도 좀 더 당당해질 필요가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충고다. 설날에 "취업했느냐"고 묻는 친지들 앞에서 고개를 숙이기보다 "곧 될 것 같습니다"고 말하며 자신 있게 웃어 보이는 여유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 도움말=서울백병원 신경정신과 우종민 교수, 한양대 구리병원 정신과 박용천 교수, 강북삼성병원 정신과 오강섭 교수, 취업포털 파인드잡 정재윤 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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