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김화영의 시베리아 열차 횡단기] 1. 무언극의 대륙이 車窓에 흘러가고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14면

기차를 타는 것 자체가 목적인 여행. 횡단열차에 몸을 싣고 광막한 시베리아 벌판을 가로지르는 건 그 자체가 인생의 축소판이다. 한국의 대표적인 지성 김화영(고려대 불문과) 교수의 25일에 걸친 횡단기록은 그래서 더욱 값지다.

김교수는 사진작가 임영균(중앙대 사진학과)교수와 함께 지난 여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를 거쳐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다녀왔다. 오로지 횡단열차만을 이용했다. week&은 모두 5회에 걸쳐 김교수의 여행기와 임교수의 사진을 연재한다. 한해가 서서히 저무는 계절, 김교수의 서정과 감성을 길잡이 삼아 시베리아 철도에 훌쩍 몸을 실어보자.

1.덜컹거리는 긴 여행, 그 앞에서

여행에는 반드시 행선지가 있다. 어디 가느냐고 물으면 부산에 간다고, 교토에 간다고, 파리에 간다고, 하이티에, 나이로비에, 갈라파고스에 간다고 대답한다. 그리고 자동차, 기차, 혹은 배나 비행기를 타고 목적지를 향해 곧장 달려간다. 그 곳까지의 도정은 한갓 수단 혹은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그때부터가 참으로 여행의 시작일지 모른다.

그러나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탄다는 것은 어디를 향해 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스크바로 가는 것이 아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가 목적지인 것도 아니다. 그런 먼 곳이 목적지였다면 당연히 비행기를 탔을 것이다. 그리하여 가장 빠른 시간에 도착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시베리아 횡단'은 기차를 타는 것 자체가 목적이다. 수단 자체가 목적이 된 여행, 그것이 기차를 타고 시베리아를 횡단하는 일이다.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는 것은 작은 '삶의 경험'이다. 그러나 그 '경험'은 무엇에 쓸모가 있는 것이 아니다. 한 인간을 성숙하게 하는데는 적어도 한 60년이 소요된다. 그렇게 성숙한 인간이 되고 나면 그때 그가 가장 쓸모 있는 곳은… 죽음이다. 앙드레 말로가 한 말이다. 삶은 무용한 정열이라고 한다. 목표를 정하고 매진하라고 가르친 스승이나 지도자는 거짓말을 한 것이다. 삶은 어디를 향해 가는 것이 아니다. 삶은 그 자체가 목적이다. 그래서 삶은 직선이 아니라 둥근 원이다. 태양처럼, 사랑처럼, 진리처럼.

지난 여름, 내가 극동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를 거쳐 상트 페테르부르크까지 기차를 타고 곧장 가면 6박7일이 걸릴 길을 장장 25일에 걸쳐 여행한 것은… 그렇다, 그것은 무용(無用)한 정열 때문이었다. 지난 여름 나는 모스크바에 다녀온 것이 아니라 내 삶의 한 은유와도 같은 길고 아늑한 고래창자 속에 들어앉아 나름대로 율리시즈의 기나긴 순항 길을 돌아온 것이다. 그 길은 뱃길이 아니라 가도 가도 끝없는 자작나무숲과 초원 혹은 감자밭의 대륙, 그 땅의 길, 기차의 길이었다. 낯선 말, 낯선 글자들, 낯선 얼굴과 풍경만 비껴가는 무언극의 대륙이었다. 지금쯤 시베리아에는 눈이 내릴 것이다. 그러나 여름에는 푸르디 푸른 광야였다.

무용한 정열에도 최초의 발단, 혹은 계기는 있다. 젊은 날, 프랑스 유학시절에 만난 캐나다 출신의 클로드 부샤르. 나는 그 친구가 읽는 책을 어깨 너머로 읽었다. 그의 전공은 20세기 초엽의 시인 소설가 블레즈 상드라르(Blaise Cendrars). 스위스 출신의 이 떠돌이 유대인은 1912년 보석상 로고빈에게 채용돼 그와 함께 문학사에 길이 남을 장거리 여행길에 오른다. "나는 위험한 것에 이끌리는 성향이 있다. 나는 한번도 미지의 것이 부르는 소리에 저항하지 못했다. 나는 밖에서 생명이 꿈틀거리고 길 위에 자동차의 경적소리가 들리고 기적소리와 뱃고동 소리가 울릴 때 네 개의 벽 속에 갇혀 있다는 것은 저주받은 사람의 고통이라고 느낀다"고 했던 그는 시베리아의 어디까지 갔던 것일까? 그러나 그런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는 미지의 공간 시베리아를 멋진 시적 알레고리로 번역해 냄으로써 '신화'를 만들어내는데 크게 기여했다. 그것이 그의 유명한 장시 '시베리아 횡단의 산문'이다. 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이 멀지 않은 격동의 시대였다.

'시베리아에는 포탄이 터지고 전쟁이었네 / 굶주림과 추위와 페스트와 콜레라 / 사랑의 흙탕물 속에 수백만의 시체가 잠기고/ 만주의 죽음은 / 우리들의 하선장, 우리들의 마지막 지옥 / 그 여행은 몸서리쳐지네 / 어제 아침 / 이반 울리치는 백발이 되었네/ 나는 보았네. 소리 없는 기차들을, 극동에서 돌아오며 유령처럼 지나가는 검은 기차들을 보았네/ 나의 눈은 등뒤에 달린 현등처럼 그 기차들의 뒤를 따라 지금도 달리고 있네/ 격리수용소에서 피가 용솟음치는 찢긴 상처들을 보았네/ 모든 얼굴에 모든 가슴에 일어난 화염/ 힘없는 손가락들이 모든 창유리를 두드리고.../ 내가 하르빈에 도착하였을 때 녹십자 사무실에 사람들은 불을 질렀네.'

그리하여 나는 뒤늦게 젊은 날의 꿈을 따라 떠났다. 부산에서 기차를 타고 출발해 서울.원산.청진, 그리고 북방의 국경을 넘어, 블라디보스토크.하바로프스크.치타.울란 우데.이르쿠츠크.노보시비르스크.예카테린부르크.모스크바.상트 페테르부르크.베를린.파리.리스본 … 유라시아 대륙을 동쪽 끝에서 서쪽 끝으로 가로지르는 젊은 날의 꿈길, 세상에서 가장 긴 기찻길을 따라 나는 떠났다. 블레즈 상드라르와 비슷한 시기에 춘원 이광수가, 또 그의 소설 '유정'의 주인공 최석과 남정임이 기차를 타고 넘나들었던 국경, 그러나 지금 서울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는 기찻길은 … 끊어져 있다. 그래서 나는 네팔 트래킹의 동반자였던 사진작가 임영균 교수와 단 둘이서 비행기를 타고 국경을 넘었다. 비행기를 타면 '국경' 같은 것은 보이지도 않지만. 그 날은 그 무슨 상징인양 6월 25일이었다. 만나기만 하면 잡혀가는 옛 소련 사람들의 땅. 떠나기 전, 몇 권의 한국어.영어.프랑스어 책과 지도를 읽었고 출퇴근 지하철 문간에 서서 키릴 문자를 떠듬거리며 익힌 것이 여행 준비의 전부였다. 그뿐, 내가 시베리아에 대하여 알고 있는 사전지식은 아무것도 없었다. 달랑 비행기표 한 장. 동행한 사진작가 임교수가 접촉했다는 동양제과 블라디보스토크 지사장 L씨의 소식은 마지막 순간에 두절되었다.

떠나기 직전 서울 서초동 시외버스 터미널 앞 곱창집에서 임교수와 함께 처음 만나 소주를 마시고 헤어진 러시아 여학생 수에타. 그녀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가 이르쿠츠크의 앙가라 호텔로 와서 우리와 만나기로 되어있었다. 마치 간첩들처럼. 러시아 국내선 비행기 요금으로 그녀에게 2백달러를 미리 주어 보냈다. 여행길 어딘가에서 서로 전화로 만나는 방법과 시간을 정하기로 약속했다. 그곳까지는 우리 두 사람이 알아서 가야 한다. 그녀는 과연 올까? 우리는 이렇게 문득 시베리아 벌판으로 내던져졌다. 가방 속에 든 하얀 골프 공처럼. 러시아의 호텔 욕조나 기차의 세면기에는 마개가 없다고 한다. 그래서 물을 가두기 좋은 골프공은 필수품이라고 들었다. 우리는 골프공처럼 날아갔다. 골프공을 지참한 것은 참 잘한 일이었다.


▶ 김화영(金華榮.62.(左))

-고려대 불문과 교수

-프랑스 엑스마르세유 제1대학교 불문학 박사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

-한국불어불문학회 회장, 프랑스 프로방스대 현대문학연구소 연구원 역임. 현 세계카뮈학회 이사

-산문집 '공간에 관한 노트' '행복의 충격', 시집 '예감-시, 눈뜨다', 논문 '알베르 카뮈를 찾아서'등

▶ 임영균(林 均.48.(右))

-중앙대 사진학과 교수

-미국 뉴욕대 사진학 석사

-퍼킨스 아트센터주최(뉴저지) 스미소니언 박물관 큐레이터, 뉴욕국제사진센터 세계사진전 심사위원 역임, 현 한국다큐멘터리사진학회 회장

-메리 포레스트 선정 전미주 10대 사진가상 수상

-개인전 7회 등 전시회 다수. 저서 '좋은 사진 만들기'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