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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옥문인들 뒷바라지 ″정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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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별처럼 반짝이는 은막의 주인공 뒤에 숨은 일꾼이 있듯 세계적 명성을 떨친 강인한 저항문인 뒤에도 숨은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70년대의 김지하씨, 80년대의 김남주씨등 저항문인들이 제 홀로 옥에 갇혀 스스로 빛을 발할 수 있었겠는가. 그 뒤에는 그들의 문학과 저항의식을 북돋우기 위해, 또 그 문학을 쇠창살 밖, 나아가 세계에 알리기 위한 무수한 몸부림과 투쟁이 있었다.
80년대 수많은 문인들이 투옥 등 탄압받을때 그들의 옥바라지를 묵묵히 해냈던 숨은 일꾼이 시인 이시영씨(42)다.
『하늘의 별처럼 많은 시인/바다의 모래처럼 많은 사람/그러나 그 중에도 밤이 깊을수록 홀로 뚜렷이 빛을 머금은 별 있고/해풍 거셀수록 숨결 가득 안으로 닦이는 모래 있었네/바람 자고 하늘 맑은 날 나는 보았네/그 별 하나 꽃처럼 터지기 위하여/수많은 작은 별들의 피흘림 있었고/그 모래 하나 크나큰 침묵으로 뭍에 오르기 위해/수많은 다른 파도들의 숨가쁜 침잠이 있었음을/하늘의 별처럼 맑고 푸른 빛/바다의 모래처럼 늙고 잔잔한 바람』(『갑에서』 전문).
위 시와 같이 「별하나 꽃처럼 터지기 위하여 수많은 작은 별들의 앞장에서 크나큰 침묵으로 묵묵히 일해온 사람이 이씨다. 이씨는 진보적 문예지 『창작과 비평』 편집자로서 80년대 민중문학의 스타들을 발굴해내고 너무 급진적으로 나아가지 않게 수위조절을 했으며 그러다가도 투옥되면 그들의 옥바라지에 온 힘을 쏟았다. 또 80년대 강제폐간으로까지 갔던『창작과 비평』과 수난을 같이했다.
이씨가 참여문학의 본산인 『창작과 비평』 편집을 맡으며 참여문학, 나아가 민중문학의 산파로 나선 것은 80년 2월1일. 70년대 말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총무간사를 지내면서 74년 유신헌법 개정청원 문인 61명 성명, 자유실천문인협의회 1백1인 선언, 79년 워커힐세계시인대회에서의 투옥문인석방요구 등 문학의 실천적 운동에 뛰어들었던 이씨를 70년대 말까지 이론지로만 머물던 『창작과 비평』이 이론과 실천의 접점을 찾기위해 편집장으로 맞아들였다.
이때부터 이씨는 강단 출신의 이론가들인 기존의 「창비맨」들과 기성문인들 및 젊은 세대의 행동파 문인들을 엮는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창비 이시영」으로 불리듯 이씨에게서 「창비」라는 관형어를 뗄 수 없는 것처럼 80년대 이후 이시영 없는 창비는 고무줄 없는 팬티』라고 밝히는 창비편집위원 염무웅씨의 말처럼 이씨는 80년 이후 창비와 그 운명을 같이 해왔다.
80년 봄호부터 계업사 검열단에 의해 부분부분 삭제받던 『창비』는 그해 7월31일 계간지 등록취소를 당했다. 주력계간지를 등록취소당한 창비사는 사무실을 허름한 창고 건물로 옮기고 단행본 출판에 몰두하다 82년 6월 김지하시선집 『타는 목마름으로』를 발간, 이틀만에 1만부가 팔려나가 일시에 출판사 재정을 만회하는 듯 했으나 오히려 세무조사를 받아 추징금 1천만원을 물어야했다.
이때 이씨는 안기부로 연행돼 고문 끝에 『타는 목마름으로』지형 포기각서를 쓸 수밖에 없었고 그가 보는 앞에서 인쇄소에서 안기부원들에 의해 지형이 갈기갈기 찢겨야만했다.
그래도 참여시·소설선집을 내며 명맥을 유지하던 창비사는 85년10월30일 무크 『창작과 비평』을 펴낸 것이 원인이 돼 12월9일 서울시로부터 출판사자체가 등록취소되는 위기를 맞았다.
부정기 간행물인 무크를 펴내면서 56호로 등록취소 된 계간 『창작과 비평』의 통권인 57호를 밝힌 것이 문제. 창비사가 등록취소되자 이에 항의하는 지식인 2천8백53명은 자필서명, 서명록을 문공부에 제출해 출판사등록취소를 재고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러한 지식인들의 집단서명에 주춤한 당국은 86년8월5일 「창작과 비평사」에서 「비평」을 빼고 「창작사」로 출판활동을 재개하도록 했다.
출판활동을 재개시키면서 당국은 편집장 이시영씨를 퇴사시킬 것을 요구해 창비사는 이씨를 형식상 편집장에서 업무국장으로 발령할 수밖에 없었다.
창비사는 87년 7월10일 무크 『창비1987』을 펴냈다. 85년도와 같이 당할까봐 통권을 못 밝혔으나 계간 『창작과 비평』과 내용과 형식이 똑같은 이 무크에 대해 당국의 제재가 없었으므로 계간 『창작과 비평』은 이것으로 실질적으로 명예회복을 한 셈이다.
이후 88년2월6일 계간 『창작과 비평』이 등록되고 2월17일 도서출판 「창작과 비평사」 가 명예회복 됨으로써 창비사는 법적으로도 완전 명예회복 되게됐다.
그러나 창비의 수난은 여기서 그친 것이 아니다. 통권66호인 89년 겨울호에 황석영씨의 북한방문기 「사람이 살고 있었네」를 게재한 창비는 그 해 11월23일 이씨가 안기부로 연행되고 가택수색도 당해야했다.
11월25일 이적표현물제작, 판매, 통신연락, 편의제공 등 국가보안법위반 혐의로 구속영장이 발부된 이씨는 90년2월3일 보석으로 출감하기는 했으나 현재 1심에 계류중이다.
이같이 이씨의 80년대는 정확하게 창비의 수난과 일치한다. 창비의 실질걱 주도자 백낙청씨(문학평론가·서울대교수)를 두고 창비와 관련, 이씨만을 당국이 탄압한 것에 대해 창비 주변에서는 『진보적 문학 및 지식의 사령관 격인 백씨는 거물이니까 못 건드리고 야전사령관 격인 이씨만 건드렸다』고 흔히 말한다.
그만큼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지 않고 조용히 문단을 탄압하려는 당국의 「배려」였다는 것이 일반적 지적이다.
그러한 80년대 조용한 문단탄압에 대하여 소리 높여 고발하던 사람이 또 이씨였다. 이씨의 표현을 빌리면 전남구례에서 태어난 『지리산 촌놈으로서 전통농촌사회가 지니고 있는 미덕에서 자신이 당한 고통은 참아냈지만 남이 당하는 고통은 참아내지 못하고 그대로 불고 다녔다』는 것이다.
70년대 김지하·양성우씨, 80년대 고은·김남주·송기원씨 등이 문학을 통한 실천운동을 펴다 투옥됐을 때 이씨는 그들의 석방운동에 앞장섰으며 또 옥중에서 그들의 작품을 빼와 발표지면을 마련해주었다. 뿐만 아니라 밖에 있는 동료문인들을 찾아다니며 모금활동을 펴 의복과 책·간식 차입은 물론 구속문인 가족의 생활까지 돌보았다.
창비의 진보적 이론을 뒷받침하는 이씨의 이러한 실천적 활동에 힘입어 창비는 온갖 급진적 문예이론이 난무하는 가운데서도 진보적 문학진영의 종가 구실을 할 수 있었으며 또 우리사회 일반통념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저항문인들의 이름을 빛낼 수 있었다.
그뿐 아니라 편집자로서 창비의 지면을 통해 채광석·김명인·현준만등 80년대 후반 민중문학론의 견인차 역할을 해낸 평론가를 발굴하고 민중시인·소설가들을 이씨는 발굴해 냈다. 『창비를 통해 나는 삶을 배웠다. 결국 자기희생이 승리로 이어진다는 삶의 진리를. 그러한 자기희생은 남에게 바쳐진다기보다 궁극적으로 자신의 뚝심에 바쳐진다는 것을 깨달았다』며 이씨는 창비와 자신의 삶을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으로 보았다. <이경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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