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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이 여인을 단죄할수 있나(권영빈 칼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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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강남의 어느 아파트에 강도가 들었다. 강도는 일가를 한방에 몰아넣고 손발을 묶어놓은 다음 집안의 패물과 돈을 있는대로 털어갔다. 어머니는 고3생 딸을 온전히 보호할 수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고마워 빼앗긴 물건이나 돈을 아까워하지 않았고 경찰에 신고도 하지 않았다.
이튿날 늦은밤,전화 벨이 울렸다. 어머니가 전화기를 들자 느닷없이 욕설이 쏟아졌다. 쌍스런 욕설을 빼고 내용을 간추리면,전화건 자는 어젯밤에 집안을 털어간 강도인데 훔쳐간 패물을 감정해보니 모두가 모조품이고 값나갈 물건은 하나도 없으니 우리는 허탕친 꼴이 되었다,패물을 지니려면 진짜를 사라는 등의 욕설과 야유가 쏟아졌다.
○허탕친 강도 딸 납치
기가막힌 어머니도 화가나긴 마찬가지여서 강도주제에 누구에게 훈계하고 욕을 하느냐고 대들었다. 이에 강도는 모년 모월까지 딸을 납치해 문신을 뜨겠다고 을러댔다. 깊은밤 강도와 어머니의 공방전이 끝난 다음 어머니는 깊은 시름에 빠졌다. 강도의 으름장대로 딸을 납치해가면 어쩌나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이튿날부터 남편과 아내는 딸 지키기에 전심전력 했다.
딸의 등·하교 길을 함께 했고 독서실 출입도 중단시켰다. 하루·이틀·열흘이 넘어가면서 점차 경계심도 풀렸고 설마 그럴리야 있겠는가 하는 안도감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결국 설마하며 안도하고 있을때 강도는 기어이 딸을 납치해갔다.
1주일이 지난 다음 딸을 찾았을때 귀엽고 사랑스런 딸의 모습은 간곳이 없고 문신자국과 피멍으로 얼룩진 넋나간 병자가 있었을뿐이다.
위의 이야기는 성폭행 인신매매단이 길거리에서 유부녀를 납치해갈만큼 극성을 부리던무렵 뜬소문처럼,아니 이웃집에서 어젯밤에 일어났던 일처럼 생생하게 전해졌던 소문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과장되기도 하고 입을 건너 전해질때마다 극화되기도 했겠지만 나는 이 소문이 결코 허무맹랑한 뜬소문이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 언제나 일어날 수 있는,그리고 일어나고 있는 개연성 사건이라고 본다. 그 개연성을 우리는 김부남 여인의 살인사건에서 다시 한번 더 확인하고 있지 않은가.
아홉살 소녀가 이웃 구멍가게집의 우물물을 길러갔다. 가게집 주인은 심부름을 시킬게 있다며 소녀를 안방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성폭행했다. 아홉살 소녀는 입밖에 낼 수 없는 욕스런 비밀을 간직한채 커가면서 먼산을 바라보며 혼자서 중얼거리는 버릇이 생겨났다. 소녀는 자라 결혼을 했다. 갓 결혼한 신부는 잠자리가 무서웠고 남편을 거부했다. 결혼 한달만에 김여인은 친정으로 쫓기듯 돌아왔다.
아홉살 소녀적의 그 욕스런 폭행이 한 여인의 멍에가 되고 깊은 병이된 것이다. 여인의 가슴 깊은곳엔 일구월심 자신의 영혼과 육체를 갈기갈기 찢어놓은 가게집 주인에 대한 증오와 원한이 켜켜이 쌓였을 것이다.
○21년 지난후 복수
올해 1월30일,김여인은 그 옛날의 구멍가게집 주인을 찾아 준비했던 칼로 배와 다리를 찔러 숨지게했다. 사건을 심리중인 법원측에서는 김여인이 사건 당시 심신미약 또는 심신상실 상태였다고 보고 유·무죄에 관계없이 치료감호 처분을 내릴 것이라 예상하고 있다. 이 김여인의 구형공판이 16일에 열릴 예정이고 김여인의 구명운동을 벌이는 대책위가 결성되면서 『21년동안 고통을 받아온 여인에게 다시 감호처분을 내리는 것은 부당하다』며 치료를 맡아줄 의료기관을 찾아나섰고 의료비 모금운동을 벌인다는 보도가 있었다.
과거속에 묻혀있던 실화와 현재속에 살아있는 소문을 함께 연결하면 김여인 사건은 21년전의 지나간 사건이 아니라 성폭행이 일상화하고 있는 오늘 진행중인 현재의 사건이다. 따라서 김여인 사건의 판결은 한 여인의 유·무죄를 판단하는 단순한 살인사건이 아니라 일상의 성폭행 공포속에서 살아가는 모든 여성,모든 어머니,모든 가장이 관심을 기울여야할 우리 모두의 중대사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사건은 한맺힌 한 여인이 심신상실 상태에서 살인을 저지른 단순사건이 아니라 이 사회의 성폭행을 어떻게 대처하고,어떻게 예방할 것인가를 가름하는 중대한 판결이라고 생각한다. 동정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사회예방적 차원에서 판결해야할 사회적 사건인 것이다.
성폭행이 끊이지 않고 만연하는 가장 큰 이유는 피해 당사자가 사건 자체를 숨기려하기 때문이라는게 전문가들의 일치된 의견이다. 나 혼자만의 비밀로 하면 가정파괴는 막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숨기려한다. 사건의 은폐가 사건을 조장하고 확산시키면서 사건은 소문으로만 떠돌고 피해자는 정신병에까지 이르는 고통과 인고의 나날을 살게된다.
강간범은 가정파괴범이 아니라 살인과 맞먹는 중죄인으로 고발되고 심판받는 풍토로 바뀌어야만 한다. 성폭행,곧 가정파괴로 인식되는 사회의식속에서는 강간범은 고발되지도,체포되지도 않을 것이다. 강간행위는 한 인간의 육체와 정신을 파괴하는 살인행위라는 살아있는 본보기를 김여인 사건에서 확인할 수 있지 않은가.
○살인과 맞먹는 중죄
김여인에 대한 법적 판결은 바로 이러한 범죄예방을 위한 사회의식의 변화를 유도하는 방향에서 검토되고 내려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다음,강간범에 의해 망가지고 찢겨진 피해자를 위해 국가와 사회가 어떤 방법으로 무엇을 보상해줄 수 있느냐를 궁리해야만 할 것이다. 왜 폭행의 피해자가 죄의식을 느껴야하고 가정까지 파괴되는 절대절명의 피해까지 감수해야만 하는가. 법과 질서가 막지못한 사회범죄 때문에 일생을 고통과 아픔으로 보낼 피해자가 늘어난다면 국가가 그 피해를 줄이기위해,사회가 이들을 따뜻하게 보호하기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야만 할 것이다.
전주 여성단체에서 벌이고 있는 「성폭력 피해자 김부남 사건 대책위원회」의 활동은 이런 여러 이유 때문에 값진 의미를 지니며 동시에 그들이 벌이는 요구와 주장이 법의 심판으로 정당하게 확인될 것임을 기대하는 마음 간절하다.<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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