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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균|20년전부터 ″재벌배우〃소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0면

신영균이 영화인 출신으론 영화계 최대의 재벌이라는 데는 중론이 일치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가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선 억측이 구구하다. 어떤 영화인은 마치 그가 신영균의 재산관리인이나 되는 것처럼 그의 재산목록을 조목조목 부연해 열거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신영균을 좀 자세히 알고 있다는 얘기가 될 뿐 정확한 것이 될 수는 없다.
―대체로 얼마나 됩니까?
『네? 하하하…혹시 와전된 것 아닙니까. 김수용감독 같은 분은 벌써 20년 전부터 나를 재벌, 재벌하고 농담 삼아 부르고 있죠. 그때 나는 금호극장과 명보제과를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서울방송 주주를 비롯해 명보극장·성남극장·명보제과 등 일련의 사업체와 더불어 명동의 금싸라기땅등 상당한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다고도 알려져 있다.
신문사조사부의 그에 관한 스크랩북을 들춰봐도 이미 20년전에 재벌배우니, 산술선수니 하는 글귀들이 눈에 띈다. 또한 배우 10년 했더니 정계에 나설 생각이 든다는 기사제목도 눈에 띈다. 그는 공화당 공천으로 출마한 적이 있고 다시 민자당공천으로 출마한 적도 있다. 모두 낙선한 것을 보면 아마 정계와는 인연이 없는 사람인가보다.
79년에는 영협이사장이 되어 인터뷰한 기사도 있다. 영화인을 위해 돈 좀 쓰겠다―는 제목의 기사에는 그가 약속한 여러가지 공약들이 나열되어 있다.
조문진감독은 그 당시를 회상하며 이젠 영화계가 좀 제대로 되려는 모양이구나 하고 기대가 컸으나 그 기대는 산산조각이 나버렸다고 고소를 짓는다. 다만 영협이사장으로서의 신영균의 공적이 있다면 그것은 쩍하면 있었던 공금 횡령을 안했을 정도가 아닐까 하고 자못 신랄하다.
81년에는 예총회장에 취임하고 인터뷰한 기사가 크게 나있다. 이 당시의 예총회장선거때는 조경희씨(현 예술의 전당 이사장)와 경합했는데 소문으로는 약 2억원의 돈이 문인단체들로 흘러 들어가자 조경희씨가 자진사퇴 했다고도 들린다. 문화예술이라면 뭐니뭐니해도 돈이 밑거름이 되게 마련인데, 그 정도의 돈을 쓸 수 있는 사람이라면 문화예술계를 위해 뭔가 일 할수 있는 사람으로 봤기 때문이란다. 그러나 예총회장때도 영협이사장때와 마찬가지로 신영균의 공약은 대체로 공약이 되어버렸다는 것이 중평이 아닌가.
신영균은 본질적으로 뭔가 선거를 통해 하는 일과는 궁합이 잘 안맞는 체질인지도 모른다. 그는 최근 평주청소년영상예술제라는 것을 시작했다.
그는 이것을 해마다 확대해 잘 키워나갈 생각이란다.
영화배우로 데뷔한지 얼마 안돼 이강천감독의 『나그네』(61년)에 출연하며 팔당저수지의 얼음을 깨고 찬물속으로 들어가 익사 일보직전에 나와 살았던 생각을 하면 참으로 먼길을 왔다고 신영균은 생각한다.
아버지역의 김승호가 노름이나 하는 망나니 아들 신영균을 교육(?)시키기 위해 겨울 저수지 얼음물 속에 틀어박는 얘기였다. 솜바지 저고리가 얼음물에 젖으니까 그대로 뻣뻣하게 얼어붙으며 그렇게 차가울 줄은 정말 몰랐었다. 『연산군』(61년·신상옥감독)을 찍을 때는 경마장의 말을 빌려 타고 달리면 그 옆을 지프가 같은 속도로 달리며 그것을 찍었다. 이때 말이 멋도 모르고 달리는 지프옆으로 자꾸만 바짝 다가가는데는 정말 아슬아슬했다.
자그마한 접촉으로도 목숨을 잃을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당시 『까짓것 영화배우가 영화찍다 죽으면 그것도 할 수 없는 노릇이지』하는 배짱이 있었다.
신상옥은 한때 한국영화계를 주름잡았지만 사업적으로 실패한 말기엔 로케현장까지 빚쟁이가 찾아와 촬영을 방해하며 행패를 부리고는 했다. 그러나 불안하기 짝이 없는 와중에서도 NG를 마구 내며 영화를 제대로 찍으려고 애쓰는 데는 감탄했다.
배우출신에겐 배우로서 구축한 허상이 있게 마련이다. 혹시 신영균은 그러한 허상으로 하여 오해(?)받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는 근면한, 어쩌면 소심한 생활인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왕년의 톱스타시대에 누리던 인기를 영화인들 사이에서도 누릴 수는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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