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프라인blog] 미들즈브러 '북한축구 추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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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미들즈브러 관중 앞에서 이탈리아전 결승골을 터뜨리는 박두익(右). [중앙포토]

이동국이 네 번째 한국인 프리미어리거로 영국 미들즈브러에 둥지를 틀었습니다. 이르면 4일 아스널과의 홈 경기에 모습을 보일 수 있을 겁니다. 일단 그가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도 홈 팬들의 사랑을 받을 것 같습니다. 나이 든 미들즈브러 사람들은 한국인에게 애틋한 감정을 가지고 있거든요.

지금도 인구가 15만 명에 불과한 작은 공업도시인 미들즈브러는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당시 4조 조별리그가 열렸던 곳입니다. 4조엔 이탈리아.소련.칠레와 함께 북한이 포함돼 있었죠.

북한은 지역예선에서 호주에 2승을 거두고 월드컵 무대를 밟았습니다. 당시 북한과 개최국인 영국은 서로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적성국이었습니다. 영국 외무부는 북한 국가가 연주되는 것을 막기 위해 개막전과 결승전에만 국가를 연주하도록 했을 정도니까요. 북한이 결승에 오를 일은 없다고 본 거지요. 당시 영국인들에게 북한은 '경직된 빨갱이 집단'이었습니다. 북한 선수단도 영국을 경계하긴 마찬가지였고요.

북한 공격수인 박두익이 영국을 향해 "민족해방전쟁(6.25)에 끼어들어 인민들에게 고통을 안겨준 원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북한은 7월 12일 소련과 첫 경기를 치렀습니다. 사회주의 우방이었지만 소련 선수들은 평균신장 1m62㎝에 불과한 북한 선수들을 거칠게 몰아붙였습니다. 위축된 북한 선수들은 힘도 못 써보고 0-3으로 패했죠. 그런데 이 경기가 미들즈브러 시민들의 동정심을 자극했다고 합니다. 전통적으로 미들즈브러 소속 클럽팀들이 약체여서 약한 팀에 일종의 동류의식을 느낀 것 같습니다. 일부 시민은 북한 숙소로 찾아와 사인을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사흘 뒤 열린 칠레전에서 북한은 어느새 홈팀이 돼 있었습니다. 0-1로 끌려가다 종료 직전 박승진의 동점골이 터지자 관중들은 껑충껑충 뛰며 좋아했고, 한 해군 병사가 그라운드로 내려와 북한 선수와 손을 맞잡은 사진이 신문을 장식하기도 했습니다. 마지막 이탈리아전을 믿기지 않는 1-0 승리로 이끌었을 땐 존 부스비 당시 미들즈브러 시장이 라커룸으로 달려가 레모네이드를 마시며 선수들과 기쁨을 나눴고 북한 선수단의 버스는 시민들에게 에워싸여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북한은 정든 미들즈브러를 뒤로 하고 리버풀로 이동해 포르투갈과의 8강전을 치렀습니다. 이미 북한 '서포터'가 된 3000명의 미들즈브러 시민들이 원정 응원을 펼쳤지만 북한은 미숙한 경기 운영으로 3-0 리드를 지키지 못하고(3-5) 무릎을 꿇었습니다. 기적의 드라마도 거기서 끝났습니다.

미들즈브러 시민들로부터 '동양에서 온 황태자'라는 별명을 얻은 박두익은 "당시 시민들이 왜 그렇게 우리들을 환대했는지 지금도 의문(영화 '천리마축구단'에서)"이라고 말했습니다. 나중에 이동국이 데뷔골을 넣으면 시민들은 그에게 어떤 별명을 지어 줄까요.

이충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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