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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는 일 빼곤 뭐든지 대행해요”

중앙일보

입력

▶돈을 받고 애인 역할을 해주는 역할대행 서비스는 TV 드라마에도 자주 소개된다. 사진은 최근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KBS2 TV 드라마 주인공 채림과 이민기씨. 드라마에서 배우 이민기는 채림의 가짜 애인으로 나온다.

이코노미스트풍경 1 파란 ‘추리닝(트레이닝복)’ 차림의 ‘백수’가 휴대전화를 붙잡고 줄기차게 통화 중이다. 잘나가는 후배에게 시종일관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며 이것저것 해달라고 조르다 거절당하자 그가 내뱉는 마지막 절규. “대한민국에서 안 되는 게 어딨니?”

풍경 2 섹시한 옷차림으로 현란한 조명 아래서 격렬하게 춤을 추는 여자. 흥분이 채 가시지 않은 얼굴로 한 무리의 남녀 일행과 클럽에서 나온 여자가 헤어지기 직전 한 남자로부터 돈봉투를 받아들고 활짝 웃으며 말한다. “애인 필요하면 언제든 전화주세요~.”

풍경 3 30대 중반이 다 되도록 남자 한번 제대로 못 사귀어본 홈쇼핑방송 MD. 그녀에겐 아쉽고 급한 일이 생길 때마다 전화 한 통이면 어디선가 ‘짠~’하고 나타나 애인이 돼주고 심부름도 해주는 20대 연하남이 있다. 그때마다 돈을 받아 챙기던 연하남이 어느 날 그녀에게 폭탄선언을 한다. “한 달간 나랑 애인 해줄래?”

각각의 풍경은 2006년 대한민국을 뜨겁게 달궜던 TV 프로그램 ‘개그 콘서트’의 ‘현대생활 백수’와 주말연속극 ‘소문난 칠공주’, 지난 1월 새롭게 시작한 수목드라마 ‘달자의 봄’에 등장하는 장면들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인터넷포털에서 폭발적으로 영역을 확장 중인 역할대행 서비스를 대변한다는 것.

두 드라마에서 각각 극중 주인공으로 나오는 연하남 강태봉(이민기)과 칠공주 중 셋째딸 나미칠(최정원)은 돈을 받고 애인 또는 심부름을 대행해준다.

드라마에서 여러 차례 주인공의 직업으로 등장할 만큼 이미 우리 사회에서 보편화된 역할대행 서비스. 업체마다 ‘대행인’ 등록사항을 보면 “죽는 일 빼고 무엇이든 시켜주면 열심히 하겠습니다”는 절박한 메시지가 넘쳐난다.

청년실업을 풍자한 신조어가 ‘이태백’을 넘어 ‘이구백(이십대 90%가 백수)’으로 심화된 실상을 반영하고 있다. 반면 대행인을 구하는 의뢰인의 메시지도 끊이지 않는다.

“결혼을 앞두고 함 들어오는 날 친구 세 명이 필요해요. 그날 와줄 수 있는 친구가 너무 적어서요. 저녁시간에 함이 들어올 건데, 옆에서 분위기 맞춰주고 나중에 예비신랑 친구들과 가볍게 맥주 한잔 하면 됩니다. 나이는 20대 중반이면 돼요.”

적게는 수십 건에서 수천 건까지 등록되어 있는 의뢰인과 대행인의 글을 보면 정말로 대한민국에서 돈만 있으면 안 되는 게 없어 보인다.

서비스 종류만 무려 100가지

인터넷 포털에서 역할대행 전문 서비스를 중개하는 업체는 대략 30곳 정도. 사이트는 회원으로 등록된 의뢰인과 대행인 간 직거래 방식으로 운영된다. 대행서비스 업체인 ㈜옴네스 김칠성 사장에 따르면 6~7년 전 인터넷포털 카페에서 역할대행 서비스가 처음 시작됐다.

이후 인터넷 포털에 전문 사이트가 생겨났고, 업계가 활성화된 시기는 3~4년 전부터다. 이 분야 업체인 플레이메이트의 김용운 과장은 “지난해 KBS2 주말드라마 ‘소문난 칠공주’에서 최정원이 애인대행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서비스가 폭발적으로 확산됐다”고 했다.

법인 또는 개인사업자가 운영하는 역할대행 전문 사이트 외에 인터넷 카페를 통해 중개를 대행하는 경우도 많다. D카페에서 검색어 ‘역할대행’을 입력하자 총 87곳이 검색됐다. 분석 결과 전체 가입회원 수는 약 1만여 명에 달했다. 2005년과 2006년 2년 동안 개설된 카페만 무려 77곳에 달했다.

업계 측 설명에 따르면 역할대행이 활성화된 배경으로 주5일 근무제 활성화, 청년실업자 수 증가, 맞벌이 부부 증가, 잡다하고 번거로운 일을 기피하고 귀찮아 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때문이다. 주말에 시간 여유가 많아진 직장인들이 ‘투잡족’에 가세하며 역할대행인으로 뛰어드는 경우도 많아졌다.

취업포털 ㈜커리어다음이 운영하는 아르바이트 전문사이트 알바루트가 지난해 1~6월 자사 사이트에 등록된 이력서를 분석한 결과 주말 아르바이트 희망자는 총 9762명에 달했다. 이 가운데 직장인이 차지한 비율은 31.2%(3124명)로 2005년 같은 기간에 비해 5.9% 늘어난 것으로 드러났다.

역할대행 서비스를 이용하려면 적지 않은 돈이 든다. 먼저 유료회원으로 등록해야 하는데 가입비는 4000~1만5000원 선이다. 월 가입비가 적은 경우 회원 정보를 열람할 때마다 수수료를 받는 곳이 있는데 건당 6000~7000원이다. 이 외에 대행인이 일을 해주고 받는 급료의 30~50%를 중개수수료로 받는 곳이 많다.

가입비와 정보열람 수수료, 중개 수수료 등 적지 않은 지출에도 불구하고 대행인을 하기 위해 사람들이 몰리는 이유는 기존의 단순 아르바이트에 비해 수입이 꽤 높은 편이기 때문이다. 역할대행인 수입은 거래 당사자 간의 합의에 따라 액수가 달라지지만 업체들이 예시한 가격은 애인·친구·부모·자녀 대행의 경우 건당 8만~20만원.

결혼식 하객 대행은 4만~5만원, 쇼핑 대행은 5만~15만원 선이다. 3000원 안팎의 시급이나 건당 2만~3만원 수준인 단순 아르바이트와 비교할 때 몇 배나 많은 큰 금액이다.

역할대행은 크게 전문대행과 일반대행으로 나뉜다. 전문대행은 특정 기술이나 자격증을 필요로 하는 전문적인 일인 반면 일반대행은 애인·친구·가족·가사·육아·행사·하객·여행 대행 같은 사이트마다 6~8개의 카테고리로 나뉜다.

업계에서 현재 대행 중인 업무는 약 30여 가지. 여기에 의뢰인의 요구에 맞춘 1대 1 맞춤대행까지 성행하면서 100가지가 넘는 다양한 서비스가 이루어지고 있다.

청소년들에겐‘부모 대행’까지

업계가 활성화되면서 구인·구직자들이 몰려들고, 특별한 기술이나 자격 없이 두둑한 수입까지 챙길 수 있게 되자 기존의 역할대행 영역을 벗어난 이색대행 종류도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추세다. 이색대행 가운데 추억여행 대행, 연애코치 대행, 셔터맨 대행을 찾는 글이 눈에 띄었다.

“그녀가 떠난 지 몇 개월이 됐어요. 둘이 함께 보낸 추억이 아직 남아있을지 모르는 곳으로 가서 기억을 더듬어 보려고 합니다. 특별히 바라는 건 없고 함께 가주셔서 제가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만 갖게 해주시면 됩니다.”

“30년 넘게 솔로입니다. 키가 작아 선을 못 본다오. 내 외모는 나도 아니까 충격주지 말고 여성을 만나 심성으로 커버할 수 있는 스킬을 가르쳐주세요.”

“대구에서 포장마차를 하는 사람(아줌마)입니다. 해주실 일은 포장마차 설치와 해체 작업입니다. 오후에 한 시간, 새벽에 한 시간씩 하루 두 시간 일해주면 됩니다. 일당 2만원 드릴게요.”

이외 이색대행으로 함이 들어오는 날 함께할 친구를 구하는 친구 대행, 신혼부부나 여행 떠날 사람을 차로 에스코트하는 공항배웅 대행, 결혼식 혼주나 상견례 때 필요한 부모 대행, 장례식 상주 가족 대행, 이별 대행, 폭탄제거 대행, 연애편지 대행, 모임이나 파티에 함께 갈 남편 또는 아내 대행, 맞선 대행 등이 있다.

공무원에서 퇴임한 뒤 ‘이 회장’이라는 닉네임으로 1년째 활동 중인 이씨가 주로 일하는 분야는 부모나 주례, 결혼식 하객 또는 혼주 대행이다. 부모 대행은 최근 10대 청소년들 사이에 그 수요가 증가하고 있다.

한 업체에 “부모 대행으로 전화 한 통화만 해주시면 돼요. 페이는 1만5000원이에요. 40대 여성분 문자 주세요~”라는 글을 남긴 의뢰인과 직접 통화했다. 고2인 최모양은 “결석한 것 때문에 선생님이 엄마한테 전화하라고 하셔서 대행인을 구하게 됐어요.

원래 아줌마를 만나 상황을 얘기한 뒤 일을 부탁하려고 했는데 경험이 많다면서 이름만 가르쳐주면 된다고 했어요. 들통나지도 않았고 아무 문제없이 끝났어요”라고 털어놓았다.

대행 서비스를 처음 이용했다는 최양은 “전혀 떨리지도 않았고 걱정도 안 했어요. 가끔 가짜 부모를 이용하는 애들이 있는데 결석하거나 학교에서 말썽 피운 걸 엄마가 알면 잔소리 듣고 혼나니까 그냥 대행하는 게 편하죠”라고 덧붙였다.

▶대행 서비스업체인 ㈜옴네스의 홈페이지. 2005년과 2006년 2년 동안 개설된 대행 서비스 카페만 무려 77곳에 달한다.

불법 거래도 성행

돈이 필요한 사람과 시간 또는 일손이 필요한 사람의 수요와 공급이 맞아떨어지는 지점에서 자연스레 활성화된 역할대행 서비스. 그런데 서비스를 이용해 타인을 속이거나 사기 등의 범죄에 악용하는 사례가 있어 문제가 되고 있다.

최근 부산 동래경찰서는 절도혐의로 이모(27·여)씨를 불구속 입건했다. 이씨가 인터넷 애인 대행 사이트를 통해 만나 애인 사이로 지내던 남성의 지갑에서 70만원을 훔쳤기 때문이다.

경찰 조사 결과 이씨는 인터넷 애인 대행 사이트에 글을 올려 이를 보고 연락한 A씨와 시간당 3만원을 받는 대가로 성관계를 포함해 빨래, 청소 등 2개월 동안 애인 역할을 해주던 중 돈을 훔친 것으로 드러났다.

한편 ‘애인 대행’ 카페를 운영하며 회원들간 성매매를 알선한 혐의로 40대 업주와 남녀 회원 10명이 불구속 입건되기도 했다. 의사, 벤처회사 사장, 대기업 부장 등 VIP 남성회원과 대학생, 모델 등 여성 회원들 사이에 수백만원을 매개로 ‘스폰서’ 계약을 맺고 성매매를 벌인 사실도 드러나 사회에 큰 충격을 던졌다.

닉네임 ‘이 회장’은 어느 날 30대 중반 남자로부터 사장 대행을 의뢰받았다. 이씨는 “알고 보니까 직장이 없는 사람이었는데 여자친구를 만날 때 사장 역할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여자친구에게 자신이 큰 회사에 다닌다며 나를 회사 사장님으로 소개했다”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그는 “간혹 사장 대행을 부탁하는 경우가 있는데 사기성이 있을 수 있으므로 조심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유령회사를 차려놓고 ‘한탕’하려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옴네스 김 사장은 “회원 간 직거래 외에 오프라인으로 업체에서 암암리에 의뢰인과 대행인을 연결해주는 경우가 있다. 이 경우 영수증도 없고 거래를 주고 받은 흔적이 남지 않기 때문에 자칫 피해가 발생해도 보상받을 근거가 없게 된다. 한꺼번에 업체가 많이 생겨 회원과 거래량이 분산됐고, 수익이 안 되니까 자구책으로 오프라인 영업을 하는 곳이 있다. 잘못하면 음성적, 불법적 거래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업계는 “바쁜 현대인들에게 꼭 필요한 맞춤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어 향후 사업 전망이 밝은 편”이라고 진단했다.

그러나 필요할 때 전화 한 통화로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역할대행 서비스가 더욱 활성화되고 발전하기 위해서는 이용자와 업계 모두 건전한 방향으로 이끌어가려는 노력이 시급해 보인다.

전문가 진단 ㅣ 현택수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

“개인주의가 ‘가짜들’ 수요 창출시킨 것”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에서 치열한 경쟁에 내몰린 사람들이 과거에 비해 시간이 부족하고, 개인주의 경향이 강해진 것 때문에, 이 같은 신종 대행 서비스의 수요를 만들어내고 있다고 본다.

가짜 친지로 결혼식의 빈자리를 채우고 가짜 친구, 가짜 부모를 찾는 것은 서로 바쁘고 남의 일에 신경 쓸 여유가 없어지는 우리 사회의 변화를 보여준다.

이는 동시에 현재를 사는 사람들이 여전히 체면이나 허례를 못 버리고 구시대적이란 설명도 된다. 도움이 필요할 때 과거처럼 주변에서 역할을 대신해 줄 사람을 찾기 어렵다는 건 그만큼 우리 사회에서 인간관계의 끈들이 느슨해지고 약화됐음을 의미한다.

친구와 가족이 해야 하는 진정한 역할이 사라지면서 이해득실에 따라 신풍속도가 빚어지고 있다. 지금 잔소리만 해대는 부모 혹은 돈만 주면 되는 부모 같은 ‘형식적인 부모’가 없다고 할 수도 없다. 이 때문에 필요할 때 돈을 주고 ‘대행 부모’도 급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부모와 자식이 무엇인지, 친구가 무엇인지, 사랑하는 사람이 무엇인지에 대한 성찰 없이 관계를 형식적으로 보니까 대행 의뢰가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가짜 애인이나 가짜 부모 등을 아무렇지 않게 내세우는 것은 자기 기만 내지 자기 분열을 초래할 수 있는 현상이다. 남의 역할을 대신해주는 사람은 자기 정체성에 문제가 올 수도 있다. 이런 역할 서비스가 성행한다는 것은 사회 구성원 개개인의 정체성 상실을 초래할 수 있다.

또 사회 전체가 형식적, 이중적으로 흘러갈 우려도 있다. 부모와 자식, 친구,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 진정한 관계 확립과 각각의 관계에 따른 정체성 확립이 필요하다.

박은경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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