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시평] 케네디를 추모하는 까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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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35대 대통령이었던 존 F 케네디가 46세의 젊은 나이에 암살된 지 40년이 지난 지금 대다수의 미국인은 그를 링컨 다음으로 가장 존경하는 대통령으로 기억하고 있다. 1789년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 이후 조지 W 부시 대통령까지 43명의 미국인들이 대통령이라는 영예를 안는 데 성공했지만 케네디만큼 미국인들과 우리의 뇌리에 자리잡은 미국 대통령은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닌 듯싶다. 이토록 케네디를 추모하는 까닭은 어디에 근거하고 있는가.

*** 빈곤 퇴치.공교육법 재임 때 구상

1963년 11월 22일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됐다는 속보가 지구촌 곳곳으로 전해지면서 미국인과 외국인, 할아버지와 손자, 백인과 흑인, 최고경영자와 신입 사원, 야당과 여당 지도자 등 케네디가 상징했던 젊음과 패기, 자유와 해방, 그리고 가능성과 희망도 그 순간만큼은 멈췄다고 느꼈을 것이다. 케네디의 죽음을 애도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케네디는 국가와 국가, 기성세대와 차세대, 부유층과 빈곤층, 우군과 적군 등 종파와 이데올로기와 배경을 초월한 초대 지구촌 대통령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케네디에 대한 보다 객관적인 평가를 외면하자는 것은 아니다. 마릴린 먼로와의 관계와 그의 다양한 병세에 대한 철저한 사실 왜곡, 그리고 라오스와 베트남에서 발생한 군사 쿠데타의 묵시적인 지지 등은 케네디 사후에 더 널리 알려졌고 케네디와 케네디 가문을 둘러싼 열띤 논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케네디는 백악관에 머물렀던 1천일 동안 각종 현안들을 해결하는 데 주력한 나머지 초당적인 지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케네디의 정치철학은 한마디로 용기를 바탕으로 한 실용주의적 이상주의로 압축할 수 있다. 공화당이 주장한 세금 삭감 법안을 지지했는가 하면 서베를린과 쿠바에서 소련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았다. 동시에 케네디 시절 부통령이자 후임자였던 린든 존슨 대통령이 60년대 중반에 공민권, 공영주택, 빈곤퇴치, 도시개발, 공교육 지원 등의 법안들을 관철시켰지만 이 모든 법안의 실질적인 창조자는 케네디였다.

이러한 그의 행보를 한편으로는 실용주의자라기보다 기회주의자로 인식할 수 있지만 하원의원과 상원의원 시절에도 국민과 국민의 복지 향상에 주력하면서도 대외정책 역시 탄력적 현실주의 노선을 고수했다. 이러한 양면성은 그의 유년 시절과 청소년 시절에도 확인할 수 있다. 케네디 가문의 장남이자 일찍이 예비 대통령 수업을 받아 온 형 조셉의 그늘 밑에서 맴돌던 케네디는 조셉이 제2차 세계대전 초기에 전사할 때까지 'No. 2'로서의 위상을 묵묵히 받아들였다. 그러나 케네디는 그의 형 못잖은 실전에서의 성과를 거두었고 하버드대 졸업 논문을 훗날 '영국이 잠든 이유(Why England Slept)'의 제하로 출간했는가 하면 '용기의 얼굴(Profiles in Courage)'은 미국에서 가장 영예로운 퓰리처 상을 안겨 주었다.

20세기에 탄생한 초대 미국 대통령이었던 케네디는 전후 미국의 부상을 상징하듯이 19세기 대영제국의 대표적 인물인 빅토리아 여왕이 미국 정부에 선사한 책상을 백악관에서 최초로 사용했다. 그러나 케네디는 미국의 힘을 가능한 한 보다 진보된 사회, 보다 자유스러운 사회, 그리고 보다 평화적인 사회를 구축하기 위한 수단으로 인식한 지도자였다.

*** 기억에 남는 베를린 장벽 연설

63년 6월 26일 케네디는 어쩌면 그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연설을 베를린 시민들 앞에서 했으며 자유의 소중함과 보편성을 강조했다. 그는 분단 독일과 냉전의 상징이었던 베를린 장벽을 보면서 다음과 같이 외쳤다. "베를린 장벽은 공산주의 체제의 실패를 전 세계가 볼 수 있도록 극명하게 보여주는 대표적인 상징물이지만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 왜냐하면 베를린 장벽은 부부와 자매와 한 민족을 격리시켰으며 이는 인류와 역사에 대한 모독"이라고 역설했다. 케네디의 40주기를 회고하면서 머지않아 한반도가 진정한 자유의 집으로 거듭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이정민 연세대 교수.국제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