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역사 기행을 마치며|철교 중간 보행용 판자 끝이 "국경선"|압록강을 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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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고구려 역사 기행을 마친 이진희씨가 집안 주변 압록강 국경지대를 돌아봤다. 이씨는 통상 만포진 철교 부근만 오가는 유람선 왕복 대신 중국측 관계 당국의 안내로 철교를 직접 찾았으며, 유람선으로는 그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만포진 하류 쪽을 둘러봤다.
중국의 개방화 정책 덕분에 이번 여행 중 압록강 뱃놀이가 가능했던 것도 흐뭇한 소득이었다.
6년전 이곳에 뫘을 때는 압록강변에서 북한쪽 사진 촬영도 할 수 없었는데 이번에는 유람선으로 왕복 약 40분간 북한의 국경지대를 돌아볼 수 있었다.

<열차 하루에 한번>
고구려 유적 답사를 끝마치자 우리들은 집안에서 가까운 만포진 대안의 국경으로 향했다.
집안 시내에서 약 20분 북상, 국경 경비 부대 정문 앞에 섰다. 잠시후 장교의 안내로 급한 계단을 오르자, 철로가 북한 쪽으로 뻗어 있고 5백∼6백m 맞은편에 북한의 국경 마을 만포진이 보였다.
이 철로로는 하루에 한번 만포와 집안 사이를 잇는 국제 열차가 왕복한다. 우리들은 강교 뒤를 따라 묵묵히 철로를 걸었다. 철교 중간쯤 갔을 때 안내 장교가 걸음을 멈추면서 『중국은 여기까지입니다』라고 하였다. 그가 가리키는 국경은 철로 옆에 깐 보행용 판자가 중단된 곳이나. 약 10m 저쪽에서는 북한측 판자가 깔려 있지만 국경을 의미하는 아무런 표지도 없다.
철교 밑은 강폭 약 3백m의 압록강. 겨울에는 얼어붙어 한반도는 중국 대륙과 연결된다. 그런데 이 강을 사이에 끼고 언어와 풍속, 역사를 달리하는 민족이 살고 있는 것이다. 국경 선상에 멈춰 서기 10수분, 나는 압록강이 지켜본 역사의 무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경비 초소도 없어>
다음날, 우리들은 중국 유람선으로 압록강을 관광하게 되었다. 압록강으로 향하던 도중「미 개방」으로 되어 있는 천추총과 마선구대총을 볼 수 있었던 것도 행운이었다. 천추총은 붕괴 된지 오래지만 기저의 일변이 1백80척으로 태왕릉 다음 가는 거대 분인데 학술 조사를 받은 적도 없다.
우리를 태운 유람선이 고산진·용회리 마을을 좌측에 바라보며 하향하기 약 20분, 독로강이 합류했다. 이 강은 고대로부터 상류에 평양 방면과 통하는 간로의 하나로 상류에 강계가 있고 구현령을 넘어서면 희천으로 빠진다. 또 하나의 길은 십여분 후에 나타나는 위원강으로, 강변을 따라 몰라 유포령을 넘어가면 강계다. 전국 시대 말기, 전란을 피해 한반도로 피란 길에 나신 타나라 사람들이 남긴 명도전의 발견으로 고대로의 존재가 증명되었던 곳이 다.
상사장리 마을 지나자 압록강의 사행 각도가 커지면서 눈앞의 풍경이 중국 땅에서 북한으로, 그리고 다시 중국측으로 빠른 속도로 바뀌었다. 그러나 지형이나 수목들의 모습에는 변함없고 언덕 위나 강변에는 진달래와 배나무 꽃이 한창이다. 강폭은 3백∼4백m. 국경을 지키는 정비정도 경비 초소도 보이지 않는 한가로운 양측 풍경이다.
그러나 이 강을 끼고 사는 양측 사람들의 모습은 전혀 달랐다. 벼농사와 밭농사의 차이겠지만 북한측은 마을마다 양수 시설이 있는데 중국 쪽에는 찾아볼 수 없다. 중국측은 옥수수 파종이 한창인데 북한쪽 밭에는 연맥이 푸르고, 모내기하는 모습도 여기 서기에 보인다. 중국측은 인민공사제가 붕괴되어 2∼3명의 가족 단위로 일하고 있는데 북한측은 8∼9명의 공동 작업이다.
초산 근교의 앙토리에 접근하자 3∼4층의 아파트가 약 30동 밀집해 있고 좀 떨어진 곳에 김일성을 찬양하는 슬로건 간판이 보인다. I979년 김일성의 현지 지도에 의해 건립되어 「사회주의 새 농촌의 전형」이라고 선전하는 내용이다. 유람선에서 아파트까지 약 3백m. 『큰 건물들이네요.』하고 중국인 선장에게 말을 던지자 『우리측을 의식한 전시용이오』하면서 불쾌감을 표시했다.
쌍안경으로 아파트들을 보고 있던 H씨가 『이 선생, 기와가 여러장 깨진 건물이 있습니다. 앗, 유리창이 없는 아파트도 있어요』라고 외쳤다. 산비탈에 4∼5호의 농가가 점재 하고 있는데 건물들은 초라하다. 그러나 집집마다 배나무 꽃과 살구꽃에 둘러싸여 있어 포근한 분위기가 보인다. 집안서 만난 한 농민의 말이 생각났다. 『인민 공사 시절은 10개월 식량 밖에 분배되지 않지만 지금은 1년 농사로 2년분 식량은 됩니다.』
우측에 유수림자강이 나타났다. 선장의 말에 의하면 집안에서 l백70리 거리라 한다. 이 강변을 따라 북상해 큰 고갯길을 넘으면 혼강 (통가강)이 나타나 고구려 발상지인 환인·흥경으로 고대로는 이어진다. 당연한 것이지만 유수림지와 조금 하류에 있는 외차구·혼강 하구 일대와 대안인 초산군 일대에는 고구려 고분들이 무수히 널려져 있다. 특히 유수림지는 집안 평야 다음가는 넓이로 고분 수는 수백기에 달한다. 그러나 l917년 일본인 학자가 지표 조사한 정도로 전모는 알려지지 않았다.

<여진족 침입 길목>
혼강 하구를 지나 약 15분, 좌측에 우뚝 솟은 돌산이 나타났다. 표고 5백19m의 연치산으로 정상에는 조선시대 여진족의 침입에 대비한 봉수시설이 있었다. 북한에서 흘러나온 충만강이 그 밑에서 압록강에 합류한다. 합류점의 경사지에 있는 마을은 내연리, 마을 뒤에 공동묘지가 보인다.
압록강을 사이에 끼고 유지되는 전혀 다른 생활과 문화, 그것은 적어도 고려시대 이후 l천년은 계속 되었고 우리는 대륙 역사의 영고성쇠와는 상관없이 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유지·발전시켜 온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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